토마스 왓슨

회심에는 복이 따른다 / 토마스 왓슨

강대식 2012. 5. 31. 16:5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 그리스도께서는 모세 당시 율법을 주실 때처럼 명령과 위압으로 하시지 않고 “입술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약속과 축복으로 시작하셨다.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부터 시작하자. 복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격언을 말하겠다.

1 회심에는 복이 따른다. 2 믿음이 깊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복받은 것이다.

 

회심에는 복이 따른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해결하기 곤란한 어려움과 맥빠지는 실망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행군은 지루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고 그들의 마음은 낙담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가는 법이 없기 때문에 축복의 관을 쓸 때까지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주고 그들의 열심을 불붙여준다. 얼마나 많은 성경 말씀이 이 믿는 자에게 복된 소식인 감람나무 가지를 그들의 입에 가져다 주는가!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6).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복은 이성적 피조물의 이상적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부지런하게 해주고 그의 뜻을 높이 가지게 하며 기쁜 마음을 가지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복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그것을 “궁극적인 목표”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쏘아 맞히려고 하는 과녁의 중심이며 이 중심으로 모든 선이 집중되어 있다. 어디에 복이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복의 본질과 그것을 향한 길을 둘 다 오해하고 있다.

 

복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것은 세상 재물을 얻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든가 “고상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우상화하고 있다. 이교철학자들은 복이란 생계수단을 넉넉히 가지는 것과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통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이 철학적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은 짐승같은 바보가 말한 것처럼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고 말하려 할 것이다. 복의 나무는 땅의 낙원에서는 자라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셨다”(창3:17)고 하지 않았는가? 이 지구의 것에서 복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싯돌에서 석유를 뽑아내려고 하거나 물에서 불을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솔로몬은 그가 즐긴 황금과 같은 모든 즐거움은 한낱 그림의 복이었을 뿐이며 빛만 나는 비참한 것뿐이었다고 우리에게 고백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8). 복은 너무 고상하고 섬세하여 자연의 토양에서는 살 수 있는 식물이 아니다.

 

복은 겉모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1) 영혼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결코 사람을 복되게 할 수 없는데, 덧없는 것들은 영혼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다. 땅 위의 것들은 덧없는 것이므로 만족을 줄 수가 없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전5:10).부가 만족을 줄 수는 없다. 그것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라는 것은 주석도금을 입힌 것이다. 부는 마치 연금술과 같아서 우리 눈에 잠시 동안은 금처럼 번쩍거리지만 종국에는 이 모든 연금술은 사라지고 만다. 부는 한 껍질의 참된 위로도 그 속에 없는 도금한 덮게와 같은 사탕발림한 거짓이요 즐거운 사기극이다. 그것들은 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적 존재이고 부는 땅에서 뽑아낸 것인데 어떻게 이것들이 영적인 실체를 채울 수 있겠는가? 사람이 그 마음을 금으로 채우는 것보다 그의 보물금고를 은혜로 채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2) 폭풍 속의 마음을 잠잠케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게 복을 줄 자격이 없는데, 땅에서 모은 것들로는 괴로움을 당하는 마음을 가라앉혀 잠잠케 할 수가 없다. 만일 영이 다치면 피조물이 이 상처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을 수 있겠는가? “악령”을 몰아낼 수금이 있는가? 비단 양말이 통풍에 걸린 다리를 치료할 수 없듯이 외형적인 것들은 양심의 번민을 치료할 수가 없다.

 

3) 잠시 동안 뿐인 것은 사람을 복되게 만들 수 없는데 해 아래의 모든 것들은 잠시 동안일 뿐이다. 이 세상의 기쁨은 말하자면 잠시 동안밖에 보관할 수 없는 고기와 같아서 이내 상하게 되어 찾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요일2:17).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니”(잠23:5). 부와 명예는 끊임없이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들은 빠른 여울물과 같이, 또는 돛을 잔뜩 부풀린 배와 같이 지나가 버린다. 그것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 그것들은 우리로부터 떠나가고 있다.

 

4) 위로하기 보다는 괴롭히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사람을 복되게 만들 수 없다. 부가 우리의 마음을 찢는 것보다는 가시가 우리의 옷을 찢는 경향이 차라리 더 적다. 부는 모을 때도 가시가 되어 근심으로 찌르며, 부를 얻고자 하는 걱정으로 머리를 찌르는 것처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다친다.

 

5) 우리가 저주받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를 복받도록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적인 모든 즐거움은 우리를 저주받도록 만든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5:13). 부는 올가미이다. “부하려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배가 금을 너무 잔뜩 실으면 그것이 가라앉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황금이 그들을 지옥으로 가라앉게 한다.

복이 겉모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복을 이 땅에다 집착시키지 말자. 이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산 것을 찾는 격이다. 그것은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다고 다고”(잠30:15)하며 계속 부르짖는 그의 영혼의 틈바구니를 메꿀 수 없고 갈증을 채울 수가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텅비게도 하시고 때로는 쓴 맛도 보게 하시어서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서는 완전한 것이 없는 것을 알아 우리의 생각을 더 고상하고 후한 기쁨이 있는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도록 유익을 주신다. 생활에 여유가 없고 눈물로 밖에는 잔을 넘치도록 채울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너무 근심하지 말기 바란다. 이 외형적 위로가 여러분을 복되게 하여 줄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좀 모자라도 여러분을 비참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나, 또는 여러분에게 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향락 때문에 당황해 하거나 흥분하지 말기를 바란다.

 

복이 있는 곳. 1) 그것은 열매 맺는 데에 있다. 가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고 그것으로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 사람이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축복 속에 있으면 그 영혼이 소유한 것을 의미있게 즐길 수 있다.

 

2) 복은 최고의 선을 열매맺는 데에 있다. 사람을 복되게 만드는 것이 선의 전부는 아니지만 최고의 선이어야 하는데 곧 하나님인 것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 하나님은 우리의 평안이 되신다(시116:7). 영혼이 묵묵히 따르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이어야 영혼을 복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을 복되게 만드는 것은 확고한 자격 또는 필수요소가 그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참된 복에는 “점점 나아진다”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영혼을 고상하게 하고 그것을 복으로 풍요롭게 하려면 거기에 영혼보다 훨씬 탁월한 그 무엇을 덧입히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인 것이다.

참된 복에는 “즐거움”이 있다. 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영혼을 말할 수 없이 기쁘게 하여줄 향긋한 맛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안에는 기쁨의 알맹이와 즐거움의 정수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게서 말고 어디에서 영혼을 기이함으로 놀라게 하고 기쁨으로 관씌울 순수한 위로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에 무한한 즐거움과 만족을 떨어뜨려 주는 꿀통과 같아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벧전1:8)한다.

 

참된 복에는 “풍성함”이 있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한 그릇 가득 마셔야 하는데 하나님 말고 어디에서 그와 같이 넉넉한 물을 찾을 수 있겠는가?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시36:8). 낙원의 강은 넘쳐 흘러서 그 은빛 물줄기를 복받은 영혼에게 쏟아 붓는다.

참된 복에는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다양함이 없는 풍성함은 싫증이 나기 쉽다. 하나님께는 “모든 충만”(골1:19)이 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탁월한 것의 복합체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매 순간마다 신선한 아름다움과 기쁨이 샘솟아 오른다.

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완전함”이 있어야 한다. 기쁨도 완전한 것이어야 하고 영광도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12:23). 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이어야 한다.

참된 복은 그 위에 “영원성”을 도장찍어야 한다. 복의 햇빛은 “구름 한 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약하여지는 법이 없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요10:28).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영원은 복의 제일 높은 연결고리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복의 실체. 회심에 이러한 복이 있으니, 이 진리를 확신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믿음의 한 항목으로 정하기 바란다.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교리를 부정하는 것의 전단계이다 회심에는 복이 따른다는 것을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격언으로 삼도록 하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 많은 진리들이 머리 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마음으로는 내려가지 않아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비록 안으로는 죄밖에 보이지 않고 밖으로는 저주밖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복은 여전히 있으며 하나님이 내게 주실 복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진지하게 명상해보면 죄인이 회개로서 자신의 죄를 끊고 복의 황금 광맥을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땀을 흘릴 강력한 근거를 찾게 된다. 그것은 죄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금욕으로, 하늘에는 탄원으로 공격을 가하여 결국에는 복의 상태에 도달한다. 죄의 쾌락이 복을 잃는 것과 상쇄할 수가 있는가? 회개를 위하여 이보다 더 강력한 동기는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아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이 복을 상실하겠는가? 아! 얼마나 정신없는 짓인가! 사도 바울은 그것들을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딤전6:9)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모든 정욕에는 그 속에 자비의 상속을 끊어버리고 행복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하늘의 낙원에 죄인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화염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은 오직 그분의 얼굴로부터만 비췬다.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최고선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는 것이다. 아! 우리가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라”(시48:14)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결코 쉬지 말자.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이 황금팔찌를 가져 그 무게 때문에 지옥으로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신다. 아! 하늘의 것을 열망하고 우리의 눈을 그곳에 고정시키며 우리의 마음이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자. 이것은 사냥을 하듯이 복을 따라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뭇 반대방향의 코스로 조종하고 있다. 그들은 지옥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땅에 집착하여 기고 있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서 스스로 축복한 사람들은 결코 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람이 독약에서 건강을 마실 수 없듯이 죄에서 복을 뽑아낼 수가 없다. 아! 복된 삶을 살아서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내”(히11:14)도록 하자.

 

은혜를 통하여 복이라는 것을 갖고자 하는 선한 소망을 가지 분들에게 나는 레위 사람이 그 백성들에게 말한 것처럼 말하고 싶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느9:5).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 위에 쏟아 부어지니 이 얼마나 무한한 감사의 조건이 되는가! 비록 여러분이 모든 것을 다 잃는다해도 하나님께서 행복의 항구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의 피의 바다 위로 여러분을 그곳으로 옮기고 계시며 성령의 강풍을 여러분의 돛에 불어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쓰러질 때 한 단계 더 높이 여러분을 올려주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의 쓴 대접 아래 놓여 있지만 그분은 여러분을 그분의 잔치집으로 인도하시고 천국의 온갖 좋은 것으로 영원히 즐길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아! 값없는 은혜,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승리를 동경하라. 주님을 위하여 쓰고 또 쓰임을 받으라.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그분에게 헌신하고, 만족하게 그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으라.

 

- 토마스 왓슨, 『팔복 해설』, pp 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