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더퍼드는 다른 세대의 축적된 학식을 사용하는 일에 대단한 신속함과 동시에 철학적인 사고를 가졌다. 경건이 항상 건강하고 진취적인 곳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그것에 동반하는 학식을 발견하는 반면에 연구의 태만은 조만간 활력 있는 경건의 쇠퇴가 따라오는 이유를 알아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분출하는 에너지는 진리를 방어하고 선포하는 일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이끈다. 반면 침체가 펴져 있고 무력함이 보편화 되었을 때 태만과 안일이 슬며시 기어들어와 신학적인 학식은 흥미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홀대하게 된다. 새뮤얼 러더퍼드와 그의 동시대 인물들에게서 우리는 생명력이 있고 유례 없는 깊은 경건과 동시에 학식을 발견한다.
러드퍼드는 한 책의 서문에서 자기가 런던에서 본 것에 관하여 넓은 마음의 사랑과 남자다운 공평성을 드러내 보인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주님께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에 그리스도 옆에 서게 될 많은 이름과 아름다운 친구들을 가지시며 이 유명한 땅에 지혜롭고, 당당하고, 관대하고, 고상하고, 영웅적이고, 충실하고, 경건하고, 은혜롭고, 학식 있는 각 층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찰스 2세의 왕정보고 이후에 1661년 그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고 마지막에는 극심한 반역의 죄명으로 다음 의회에 출두하라는 소환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소환이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임종에 임박해 있었고 그것을 듣고 자기는 더 높은 재판장과 법정 앞에 서라는 다른 소환장을 받았다고 조용히 말했다. 그는 전갈을 보냈다. “저는 저의 첫 소환에 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날이 오기 전에 저는 왕들이나 귀족들이 거의 올 수가 없는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1661년 러드퍼드가 사망한 곳은 세인트 앤드루스였고 거기에 그는 매장되었다. 라몬트의 일기는 말한다. “그는 3월30일에 평범한 매장지에 묻혔다.” 그가 몇 주 더 살았더라면 그가 편지로 격려했던 친구인 제임스 거스리가 당했던 잔혹한 죽음을 그도 당했을 것이다. 핍박자들은 그가 대학 내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가결했을 때 버레이 경은 일어나서 말했다. “여러분이 그를 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 나라가 슬퍼했다. 오늘날까지 그렇게 잘 알려지고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경건한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은 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컸던지 이 사람의 시신이 묻힌 곳에 자신들이 묻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로디안 후작은 러더퍼드가 태어났던 초가가 서 있는 지점을 지나갈 때마다 자기 모자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교회 마당에 있는 그의 묘비의 비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떤 혀나 어떤 붓이나 사람의 재주가 유명한 러더퍼드를 기릴 수 있으랴!
그의 학식은 정당히 그의 명성을 높였고 진정한 경건은 그의 이름을 장식했다네.
그는 위에 있는 것과 사귀었으니 임마누엘의 사랑에 친숙했다네.“
- 러더퍼드, 『서한집』, 엔드류 보나르의 서문에서, pp 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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