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은 때로 확신을 믿음의 열매로, 때로 믿음의 특성으로 말한다. 그들은 믿음에서 자라나는 확신과 확신으로 성장하는 믿음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말한다. 확신은 충분히 성장하여 성년이 된 믿음이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복음의 매시지의 진리에 대한 신념(belief)으로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믿음은 영적 조명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조명에서 성령께서는 마음을 밝혀 신령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시는 그 일들의 객관적 진실에 대해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신다. 이 지식을 주는 신적 작용을 칼빈과 그의 계승자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칭했다. 바울은 고전2:4에서 이를 ‘성령의 나타남’으로 칭한다.
구드윈은 말한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역사하실 때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로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요일5:20) 곧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신다. 둘째로 성령 자신께서 이 새로운 지각 위에 빛으로 오심으로 영적 실재들에 대한 영적 시야를 주신다.” 복음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성령의 이 증거는 개인의 믿음에 있어 기본 요소이며 성령께서 주시는 복음의 이 ‘원만한 이해’의 확신은 구원에 대한 개인적 확신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믿음은 정신 계발보다 더 월등한 것이다. 믿음은 머리에서 심령까지 이르며 박스터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신뢰’라고 칭한 바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약속들에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 자기 의존과 죄에서 돌이킨다. 이로써 그는 자기 영혼에 믿음의 기질을 표현하고 확립한다.
그리고 일단 확립된 믿음은 생활의 역동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믿음은 소망을 낳고, 사랑으로 역사하며 인내로 자신을 단련하며 선행에 나서며 마음 속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기쁨과 평안의 원인이 된다.
“믿음은 중심 바퀴로 다른 모든 미덕들을 진행하게 한다”(토마스 왓슨). “믿음은 시계의 태엽으로 모든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의 황금 바퀴들을 진행시킨다.”(토마스 브룩스). 이렇게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 일정한 양의 확신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청교도들이 오직 그 이름에 적당한 것으로 간주한 ‘확고하고 근거가 충분한’ 확신이 아니었다. 젊은 회심자가 드문 경우로 계속적인 강한 위로를 즐거워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대개 그런 확신은 믿음이 의심과 감정의 동요와의 전투에 의해 단련되고 연마되고 원숙해지고 강해지기 전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환희와 황홀감이 첫 번 신앙 고백에 수반될 때 다소 의심쩍게 여겼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렇게 현저한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돌밭과 같은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했다. 성실하고 확실하고 철저한 회심자들은 대개 그와 같이 시작하지 않는다고 청교도들은 생각했다.
충만한 확신은 성인들 중에서도 희귀한 축복이며, 마구잡이로 주어지지 않는 크고 귀한 축복이다. “확신의 대부분은 인간들의 심령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자비이다. 하나님께서는 확신을 오직 자신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사랑하는 벗들에게만 주실 것이다.”
확신은 이생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영광의 아름다움이며 절정이다. 확신에는 대개 가장 강력한 기쁨, 가장 달콤한 위로들 그리고 가장 큰 평안이 따른다. 확신은 소수만이 쓸 수 있는 면류관이다. “확신은 강한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다. 이것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아기는 있다 하더라도 소수이다”(브룩스). “확신은 믿음의 보상으로 온다. 사람의 믿음은 먼저 싸워 승리를 얻어야 한다. 그때에 확신은 면류관이며 믿음의 환희이다. 확신은 시련 후에 오는 것이다”(구드윈).
청교도들에게 ‘확신’은 5분간의 질문(“당신은 요1:12를 참되다고 믿고 ‘그를 영접’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을 받은 자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확신은 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념으로, 믿음이 생겨날 때 복음의 진리가 마음에 인증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령에 의해 마음에 인증되며 동시에 즉각적인 확실성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 초자연적인 확신이 나타날 때 그의 그리스도인 삶 전체가 변화된다. 구드원은 말한다. “확신은 새로운 회심이다. 확신은 사람을 과거의 그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이 과정은 회심에 의해 그가 회심하기 전의 사람과 달라진 것과 거의 똑같다. 인간의 모든 장점들이 새롭게 수정되는 것이다.” “확신은 믿음을 증대시키고 이 믿음의 활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곳에 새로운 에너지를 방출하는 결과가 된다.”
확신은 사랑의 구속 계획을 묵상하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한다.
확신이 생겨나면 영적 이해력이 자극받아 그로 인해 “영혼의 눈이 강해져서 진리를 더 자세히 파악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모든 진리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된다.”
확신은 기도할 때 담대하고 능력을 갖게 한다. 확신은 더 거룩하게 한다.
확신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피곤하지 않게 한다.
확신은 다른 사람을 전도하라고 강하게 압박한다.
“확신 아래 있는 영혼은 동행이 없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확신은 벧전1:8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동반한다.
- 제임스 패커, 청교도사상, pp 24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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