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지적 기관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양심을 드러내고 복종하기 전에는 진정한 영적 깨달음이나 참된 경건이 있을 수 없었다.
웜즈에서 한 루터의 중대한 말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리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1530년의 아우스버그 신앙고백 20장 칭의 교리에 대한 유명한 문장, “이 교리 전체는 ‘양심의 전투’와 관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투가 없이 이 교리는 이해될 수 없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율법의 심판 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였다. 양심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이 내려지는 법정이었다. 양심은 이 곳에만 참된 믿음과 소망과 평안과 기쁨이 자라날 수 있는 온상이었다.
살아 있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의 엄중한 지시와 성령의 조명을 받는 양심의 이해와 활동에 직접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청교도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전체로서의 서양 사회에 있어 양심은 부패하였다. 배교가 일어남으로 믿음이 타락할 때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도덕 기준들이 타락하고 있다. 지식인들 중에서 때로 양심은 악용되고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그들은 화있을진저”(5:20). 기독교회에서 양심은 예민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퍼킨스 이후 모든 청교도 신학자들은 양심을 선과 악, 의무와 의무 포기에 대한 문제들을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권위있게 처리하는 이성적 기능, 도덕적 자각과 판단의 능력으로 이해함에 있어 일치하였다.
토마스 구드윈, “양심은 실천이성의 한 부분이다”. 양심이 작용할 때 상당히 자율적이라는 것은 보편적 경험이다. 비록 때때로 우리가 양심을 억압하거나 억누를 수 있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양심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하며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양심은 우리 위에 존재하여 우리가 주지도 않았고 우리가 빼앗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양심을 인격화하고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파수꾼과 대변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단순한 환상의 비약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필연이다. 청교도들은 양심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부섭정”,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염탐꾼”, 하나님께서 죄인을 체포하기 위해 고용하신 하나님의 경찰“이라고 한다.
십스,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 이 양심의 법정을 설치하셨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홀이다. 그리고 양심은 모든 역할을 행한다. 양심은 기록하고 증거하고 고소하고 심판하고 처형한다.”
페너, “양심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모두 우리에게 말해 주는 설교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양심은 강력한 설교자이다. 양심은 훈계하고, 강권하고, 선동한다. 양심은 하늘 아래에서 가장 견고하고 다루기 힘든 심령을 수시로 흔들어 놓는다. 양심은 하나님 자신의 영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우리를 지도한다. 그러므로 성령과 양심은 함께 반항을 받거나 순종을 받거나 하며 함께 탄식하거나 즐거워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무조건적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이 양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따라서 이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스스로 주권적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에 제한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맞추라는 피할 수 없는 요구가 따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지 그릇되게 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양심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그릇된 양심을 좇는 것이나 모두 죄악이기 때문이다.
박스터는, 양심이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당신 자신의 판단이나 양심을 당신의 율법이나 당신이 해야 하는 의무의 결정자로 삼지 말라. 양심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의 분별자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하신 의무의 분별자이며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에 대한 분별자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위험한 오류가 너무나 평범하게 증대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입법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양심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분별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라고 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릇된 양심은 순종하지 말고 잘 분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그 길은 우리의 양심에 성경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계시된다. 청교도에게 있어 성경은 계시 그 자체였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었으며, 믿음과 생활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분명한 지시를 주시기 위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성령께서 기록하신 하나님 자신의 구속의 활동과 계획에 대한 신령한 간증이었다.
청교도에게 있어 경건은 본질적으로 양심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경건은 알려진 복음 진리에 대한 충심의, 훈련된, 신중한 응답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선한 양심을 소유하고 유지함에 중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한 양심은 번연의 순례자와 같이 깨달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한 양심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을 통해 유지된다.
청교도는 선한 양심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십스, “양심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가 아니면 제일 악한 대적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을 아는 양심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 선한 양심은 부드러운 양심이다. 불신자의 양심은 너무 굳어 있어 거의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구하며 자기 경계와 자기 비판에 민활하게 부단히 활동한다.
청교도의 설교에 대한 이상에 있어 가장 독특한 특징은 듣는 사람들의 양심에 진리를 적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강조였다. ‘신령하고 유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준은 사람들의 양심을 찢어 열어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스스로를 직시하게 하는 적용의 정확성과 신실성이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절하게 적용하는 기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를 능력으로 적용하신다는 경험에서 나온다. 신중하고 통찰력있는 적용들로 타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가장 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가장 깊은 훈련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청교도는 말한다. 오웬, “만일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복음에 기초된 것이었다. 독선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복음에 기초된 것이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의 절대적인 윤리적 동기들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였으며 자신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었다.
청교도의 윤리적 가르침은 독재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가르침은 성경의 해석과 적용으로 주어졌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양심이 인간의 가르침에 속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속박되기를 바랐다. 청교도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하게 일치될 때에만 거기에 속박되기를 원했다.
청교도 성직자들은 원칙을 포기하는 절개없는 자로 보임으로 그들의 과거의 목회 전체를 손상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필요하다면 고난을 받음으로 자신들이 공적으로 주장해 온 바를 진리로 확인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편의는 부정한 행동의 정당화가 될 수 없고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진리를 따르고 세상이 어떠한 대가를 준다 해도 그 진리를 팔거나 버리기를 거절하는 그들에게 있어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유일한 길을 택함으로 선한 양심을 지켰다.
오늘날은 교회 생활의 타협 시대이다. 계시된 진리의 존재 자체가 널리 의심되거나 부정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고 성경이 그 계시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 다른 말로 우리가 청교도의 견해를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청교도를 특징짓는 성경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정절은 우리의 특징도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이 라오디게아와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빛과 그 진리를 적용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양심과 어떠한 희생도 무릅쓰고 그 진리를 고수하는 양심적 행동을 허락하옵소서.
- 제임스 패커, 『청교도사상』, pp 14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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