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5권29장 성령의 증거와 성화의 관계

강대식 2012. 10. 9. 06:24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더 높이 올라갈수록, 어떤 교리가 특별히 중요하다면 원수의 공격은 비상하게 강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법칙이다. 특별히 그것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라는 이 문제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이 체험과 성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일어나는 현대적인 혼란은 존 웨슬리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가능한 것이며 그것을 받고 난 뒤에 그는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사도행전 15:9과 26:17-18이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행 15:9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 26:17-18 )

 

이상한 구절이나 진술을 만나게 될 때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문맥과 상황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문맥을 살펴볼 때 성화의 교리가 두 경우 어느 곳에서도 제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에서의 초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이방인들의 지위와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잘못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기독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더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할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방식에 의해서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서도 주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있어서도 정확히 같은 요점이 성립되게 되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10)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이방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 진술이 이제 그들에게 해당된다고 말한다. 두 구절의 “깨끗해졌다”는 말이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용어의 의미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두 진술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믿음으로 거룩한 족속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방인들은 이제까지 그들을 얽매고 있었던 것에서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고린도 전서 6:9-11에서 ‘거룩함’이 ‘의롭다함’ 앞에 놓여있음을 주목하라.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 사도가 ‘칭의’가 ‘성화’ 앞에 와야만 된다는 것을 잡자기 망각하였는가? 사도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다. ‘거룩함’은 단순히 ‘불신앙의 악심’ 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과 건지는 것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의 경우도 “성령의 거룩케하심”을 “진리를 믿음으로” 라는 말보다 앞에 놓고 있다. 그것을 정확히 해석하는 유일한 방식은 보편적인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성화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내산이 구별되고 ‘거룩한 성산’으로 불리게 된 것과 같이 이들도 성령에 의해서 구별되었으며 진리를 믿는 믿음이 따라온 것이다.

 

두 구절(행 15:9, 26:18)을 해석하여 자기들은 완전히 거룩함을 입었다고 자신들을 설득시키는 정직하고 진지한 이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후에 죄에 빠지게 될 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옆에서 관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조롱꺼리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변명에 중대한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성화의 교리에 대해서 아는 바로는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다음에 거룩하게 되는 일이 뒤따라 오며, 그 일이 점진적으로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이 어떠한 순간에 있어서 ‘믿음에 의한 완전 성화’의 가능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두 구절의 진술들 속에서 대하는 것은 다만 ‘구별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잘못된 교훈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거룩함은 제2의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졌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의롭다함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은 그 제2의 축복으로 들어간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가 믿음으로 완전한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훈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교린도 교회 사람들이 ‘완전한 거룩함을 입었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만일 ‘완전한 성화’ 교훈이 진리라면 이 신약의 서신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롬8:13-14, 약4:8, 마15:17-20을 보라.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며 우리 가운데 죄가 제거 되도록 싸움을 싸워 나가야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신약서신들이 같은 교훈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체험과 성화 사이에 참된 관계는 무엇인가?

답변은 그것이 직접적인 연관이나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접적인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자기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는 죄짓지 않아야 되겠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순간에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죄에서 깨끗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질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자극시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씨를 파종하고 싹이 트고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성장이 더디어 아무런 자람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할 때 모든 것이 파랗게 된 것을 발견한다. 지난 몇 주간 동안에 일어났던 것보다 한 날 오후에 일어났던 것이 더 많게 된다.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었고, 햇빛과 비로 그 생명이 갑작스럽게 피어 오른 것이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성화의 과정이 시작된다. 생명과 거룩의 씨앗이 우리 속에 심겨져 있다. 이것이 성령의 증거와 우리의 성화 사이의 관계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간접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성화에 대한 최대의 자극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 자체는 아닌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