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 그리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말하는 목사-신학자는 바로 이런 의미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특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위대함을 주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및 세상에 대해 올바르고 깊게 생각하라. 그럼으로 우리 마음의 애정이 진정한 토대에 근거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바와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1) 지식에 따른 열심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만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참된 지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성의 발휘가 필수적이다. 로마서 10장의 처음 두 구절은 그들의 열심이 지식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기독교 기쁨주의도 만일 그 열심(열정)이 참된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
2) 사색을 통한 깨달음
딤후2: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하나님이 깨달음(총명)을 주시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사색과 깨달음은 둘 다 있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색을 통해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몇 분마다 잠시 멈추고 이렇게 기도한다. “오 하나님, 내 눈을 열어 주시고 내게 빛을 비춰 주소서! 내가 진짜 여기에 있는 진리를 깨닫는 일은 성령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음이 성령께 달려 있다는 사실이 내가 사색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성경 진리에 대한 깊은 사색은 성령이 우리에게 진리를 열어 보이시는 방편이다.
3) 논증을 통해 주어진 생명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을 기독교인이 되도록 설득하기 위해 거듭해서 회당에 들어갔다. 바울은 이 불신자들이 죄와 허물로 눈과 귀가 멀고 죽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려 했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이 방편을 사용하여 생명을 주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논증을 통해 생명과 진리가 전달되도록 정해 놓으셨다. 벧전1:23에 있는 대로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 거듭난다. 새로운 출생은 성령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에 대한 논증을 통해 그 기적을 행하신다.
행 6장에 누가가 루디아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바울은 지성과 언변을 발휘하여 그들을 설득한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따라서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루디아의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달하는 바울의 지성과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게 하시는 성령이 둘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4) 예수님은 논리 사용을 당연히 여기셨다
누가복음 12장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논리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시고 인간이 논리를 잘 사용할 책임이 있다고 여기시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은 이렇다. 첫 번째 전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둘 째 전제; 플라톤은 사람이다. 결론; 플라톤은 죽는다. 나는 이 삼단 논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부당한 논리도 있다. “소는 다리가 넷이다. 내 개는 다리가 넷이다. 따라서 내 개는 소다”라는 삼단 논법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그런 논리는 악당이 당신을 독재자의 감옥에 집어 넣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이며, 당신에게 ‘논리’에 의지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논리가 상대화되면 힘이 정의가 된다.
(눅12:54-57)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첫 번째 전제; 남풍이 불며 언제나 날이 더워진다.
두 번째 전제; 지금 남풍이 불고 있다.
결론; 오늘 더울 것이다.
복음 없이도 비신앙인은 놀라운 방식으로 자기 지성을 발휘한다. 나는 예수님이 대학 교육을 받은 비신앙인에게 “어째서 나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 너의 뛰어난 지성을 발휘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은 바로 이 일, 즉 진리를 아는 일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어울리는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일깨우는 일을 한다.
5)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지성의 발휘
마태복음21:23-27.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지성을 발휘한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런 행동에 화가 난다. 우리는 미국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한 확신을 얻기 위해 지성을 발휘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감수하며 진리를 위해 고난받기보다는, 계속해서 함정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진리를 탐구할 때 당신의 지성이 당신을 곤경에 빠지게 할 확신으로 이끌어 간다 해도, 그 진리를 믿어라! 그 진리를 말하라! 갈등이 두려워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감추는 목사가 너무도 많다.
이 사람들이 지성을 발휘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예가 고후4:2에 나타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4:2). 이 구절은 경건한 목회자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묘사다.
나는 이런 설교자가 되고 싶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성실하고자 애썼다고,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뭐라 말할지 늘 촉각을 기울이고, 사람들이 할 말에 따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좌지우지되는 그런 목사가 되고 싶지 않다.
따라서 훌륭한 학문적 태도(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는 데 지성을 잘 발휘하는 것)는 정직하고 담대한 사역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그런 사역의 목표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영혼을 확고한 발판 위에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역의 목적은 분명하게 보고 용기 있게 말한 진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6) 바울의 수사학적 질문
바울 서신에서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열세 차례나 사용한다.바울은 수신자들이 마음을 변화시킬 지식을 갖도록 돕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바꾸는 방법이다. 교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교묘히 조종하거나 강압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애정을 일깨우려 애써야 한다. 마음에서 우러날 때 입이 말하고 몸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랑을 불러일으킬 지식이 교인들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식이 교인들의 애정을 변화시킨다. 지식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마귀도 지식은 풍부하다). 성령은 지식을 사용하여 새로운 갈망과 새로운 경이, 기쁨을 불러 일으키신다. 이렇게 변화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신다.
7) 가르치기를 잘하는 목사
성경은 엡4:11에서 예수님이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 목사와 교사는 “가르치기를 잘해야”(딤전3:2)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모든 목사는 하나님이 나를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교회에 선물이 되는 길은 유능한 교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목사가 할 일은 성경을 살펴보아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또한 교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며 매력과 감동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다. 눅24:32은 교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마음을 뜨겁게 하는 성경 강해에 대한 열정을 모든 목사에게 불러 일으킬 것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나는 “오, 하나님, 제가 그런 교사가 되게 해 주옵소서. 교인들에게 성경을 열어 보일 때 교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소서”라고 일기에 썼다. 사색과 이해, 가르침(학문)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는 것이다.
8)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아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노력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7). 우리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경을 근거로 가르쳤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일관되고 통일성 있게 요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 이해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게 전달하려면 정신적인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딤후2:15,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강해자는 ‘일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정신노동을 해야 한다. 누구도 힘겨운 정신노동을 신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지성을 발휘하며, 우리의 지성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함으로 성령을 의지한다.
9) 힘겨운 정신노동인 읽기
성경은 책이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셨다. 예수님은 많은 것을 가르치셨고 많은 일을 행하셨다.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을 부어 주셨다. 그런데 토대가 되는 그 모든 말씀과 행적이 책에 담겨 있다. 요점은 바로 이 요긴한 책을 잘 읽는 일은 힘겨운 정신노동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제껏 배운 가장 학문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많은 부분(바울 서신과 예수님의 설교 같은)이 진주 목걸이 같다기보다는 쇠사슬 같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 저자들은 그저 영적인 보석을 죽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논증의 사슬을 단조(鍛造)해 낸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은 앞뒤가 맞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계속 연결되어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논증이 단락 전체로 확대된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마음을 밝히실 때 이 논증의 사슬에 불이 붙는다.
목사는 적극적이고 세심하고 정밀한 읽기를 통해 이런 논증을 추적해야 하며, 문장과 전후 관계와 큰 단위를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교인들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책을 통해 계시를 주셨다. 우리의 신앙이 책에 대한 이해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읽는 법을 배우게 되기를 원하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성경에 대해 주의 깊고도 교리에 맞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성경이 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목사가 주의 깊고 정확하게, 철저하고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목사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 전체를 통해 하신 일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는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맛보고 선포하도록 나를 준비시키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문적’이라는 말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지식의 최대 목적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책을 통해 자신을 주권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 따라서 내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알고 즐거워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런 기쁨을 누리도록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목회자가 품고 있는 목표라고 확신한다.
- 존 파이퍼, 돈 카슨, 『신학자로서의 목사, 목사로서의 신학자』, pp 61-80
'성경적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아사랑은 편협하고, 제한적일 때만 악이 된다 / 존 파이퍼 (0) | 2012.10.24 |
---|---|
존 파이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부흥과개혁사, 2003 (0) | 2012.10.24 |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 / 존 파이퍼 (0) | 2012.10.22 |
가슴 찡한 실체보다는 이론적인 것이라 느끼게 될 위험 / 존 파이퍼 (0) | 2012.10.18 |
존 파이퍼, 돈 카슨, 『신학자로서의 목사, 목사로서의 신학자』, 부흥과개혁사, 2012 (0) | 2012.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