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의 발생으로 인하여 신학적 연구는 다시 복잡하고 난해한 일이 되어버렸다(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3권을 보라). 절대적 진리의 상실은 절대적 도덕의 상실로 끝나고 말았다. 신학의 중요성은 실존주의에 의해 극히 줄어들어 왔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진리로서의 진리란 더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게 되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리가 타락하게 되면, 복음주의의 방법과 행동의 원칙까지도 역시 타락하게 된다.
밀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청교도란 과거 역사가들이 오랜 동안 생각해온 것같이 수척한 몸매에, 검은 모자를 쓰고 머리는 길다랗게 늘어뜨린, 흥이나 깨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우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영적 헌신의 깊은 지각을 소유한 다채로운 사람들이었다. 17세기 청교도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한 사람이 청교도들을 묘사하기를, 그들은 누구에게보다도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고, 또한 가장 좋은 기독교인이란 가장 좋은 남편과 아내, 부모, 자녀, 주인, 그리고 종이 되어야 하며,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한 교리가 모욕을 당하지 않고,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초기 청교도인 윌리암 퍼킨스(Wiliam Perkins)는 케임브릿지 대학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그런데 예정과 파멸에 대한 교리를 다룬 그의 ‘금사슬 이론’(Golden Chain)은 이 책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결의론적 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윌리암 암즈(William Ames)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퍼킨스의 강의를 들은 그의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퍼킨스는 학생들을 진리 안에서 건전하게 교육하였고, 그들에겐 경건함을 추구하도록 잘 이끌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하에 있는 진정한 종교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증진시키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완전한 정화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자, 청교도들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신학자들이 되었다. 케반은 “그들은 설교를 베풀었고 기독교회의 개혁이 성경적 원칙들에 대한 충분한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영국에 있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려는 과업을 수행하였다”고 하였다. 국교회의 약점은 종교개혁 자체의 약점 때문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원칙들을 충분히 따르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근본주의는 청교도주의의 소산이며, 또한 순수한 교리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거의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영국 개혁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더 나아가서 아예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조차 못한다.
청교도 신학자들의 특징은 그들은 첫째로는 설교자들이었고, 둘째로는 신학 저술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저서들은 주로 그들의 설교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교리를 기독교인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한 것 때문에, 그들의 저서들은 자연히 실천적 신학으로 되어졌다. 청교도들은 상아탑 신학자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설교자였다.
청교도(Puritan)라는 명칭은 청교도들은 속이 좁은 위선자들이라고 간주했던 국교회 고교회파교도들(High Church Anglicans)에 의해서 청교도 운동에 경멸적으로 주어진 이름이었다(이는 마치 오늘날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가끔 적용되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보다 더 빨리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을 정죄해 버린다.
청교도의 헌신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이다. 청교도들은 교리의 순수성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청교도 성직자들은 그들의 양떼들을 다정하게 이끌어주고 기독교인들을 사단의 간계로부터 벗어나게 인도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예수 안에서 안식을 얻으라고 권고하는 데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리차드 그린햄과 그의 사위 존 도드는 복음을 가장 무지한 영혼들에게도 그들 자신들의 어휘와 표현들로써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실로 유명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격론자들과 광신자들을 탄핵하였다. 그들의 영적 신앙은 신실하였는데, 그것은 성경적 교리를 실행한 결과였다.
청교도의 헌신에 대한 열쇠는 훈련이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운명에 내어 맡기는 생활이 아니라 훈련된 생활이다. 너무 많은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이 원칙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 교회들이 진리는 놓치고 거짓들을 붙잡는 것이다.
청교도의 마음 중심에는 절대적으로 권위있는 성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단련시켰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변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직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종교개혁도 중단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인생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토마스 크랜머는 “… 이 책은 가장 값비싼 진주요, 지구사에 남아있는 가장 거룩한 유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썼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강조점을 포함하였다. 도덕적 율법은 단련된 신자들에게서 그 권위를 발휘하며, 또한 그것은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다. 케반은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율법의 권위는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청교도의 관념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청교도들은 결코 이러한 복종이 구원에 대한 기준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마음의 피할 수 없는 결과요,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이 되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율법의 실제적 적용을 강조하였다 : 즉 죄를 견제하고,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며, 신자들의 행위를 이끌어 주는 것 등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율법은 죄인이 그의 커다란 실패와 궁핍을 깨닫도록 하며, 또한 신자가 거룩함과 정직함을 얻기 위해 싸워 나가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소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과 같이 될 수 있으면 세상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경건되이 살려고 하였다. 크랜머는 “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선한 행위를 수반한다”고 기술하였다. 단지 진정한 의로움만이 인간의 신앙과 회개의 진실함을 증거해 준다. 에드윈 샌디즈는 “또한 우리가 그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는 우리가 그를 계속적으로 섬기는 생활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20세기의 교회는 설교와 신학에 대한 기독교의 힘있는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이 진리를 회복하고 재강조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샌디즈는 다시 기술하기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다면, … 우리들은 그렇게 무관심한 방심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보다 좋은 효과를 나타낼 것이며, 또한 보다 많은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침내 불신앙과 세상적인 욕망을 내어 던져버리고, 건전하고 정당하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양떼들을 먹이기에 더욱더 부지런하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성화는 신자의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이지만, 그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단련의 과정을 수반한다. 존 주웰(John Jewel)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영원한 왕국의 상속자들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록한 복음의 선생들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삶에 대한 이런 열렬한 헌신은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도리를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청교도 신앙은 가톨릭 신앙과 크게 대조되었다. 신플라톤주의를 기초로 한 후자는 기독교인의 생활가운데 정죄(淨罪), 조명, 연합 세 가지 단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청교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인의 생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와같이 “모든 영적인 생활과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충만함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지고, 그와의 연합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은혜를 간직하는 처음 과업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우리가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를 최소로 하려는 에큐메니즘의 홍수를 견디어내려 한다면, 오늘낱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진리들을 다시 붙잡아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진리에 충실하는 것은 청교도 신앙의 진정한 특성들이었다.
- 에드워드 힌슨,『청교도 신학』, pp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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