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11 주일설교, 생명의 길

강대식 2015. 1. 11. 16:45

본문: 7:13-20

 

우리 주님은 본문에서 3개의 명령을 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열매를 보고 알라.

이 세 명령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

 

1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고 멸망의 문은 크고 길이 넓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세상은 크고 넓고 많고 높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좁고 협착한 길을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그곳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로마 황제의 권력과 부, 크고 넓은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로마 총독의 권력의 희생자로, 좁고 협착한 것, 십자가 처형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만주의 주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당시 예수님을 처형하던 권력자들,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주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

,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16:25)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으며

불꽃 가운데서 혀를 서늘하게 해줄 물 한 방울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던 거지 나사로는

이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고통 중에 있는 부자를 내려다 보는 신세로 바뀌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어왔을 때 주님의 대답이시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0:4-6)

 

천국 복음은 크고 넓은 길로 가는 자의 몫이 아니요,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자의 몫인 것이다.

당시 크고 넓은 길로 다수가 가는 길로 가던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로부터 죄인 취급 당하고 소외 당한, 좁고 협착한 길을 가던 이들만 영접하였다.

주님은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지 의인들을 구원하고 축복하러 오시지 않았다.

 

산상수훈에서 복있는 사람, 천국이 저희 것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크고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아니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는 자들이다.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주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크고 넓은 것들을 더 사랑하여 왔다.

여호수아와 그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죽자 가나안 땅은 암흑시대로 들어갔다.

(사사시대는 왕(하나님)이 없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는 로마가 국교로 인정하면서부터 사사시대를 재현하였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시기에 잠시 바른 길을 가는 듯하다가 다시 세속화 되고 말았다.

 

주님의 명령과 권고는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은 다수결이 아니다.

다수가 간다고 해서 문이 크고 길이 넓다고 해서 쫓아가다가는 그 문 그 길이 멸망의 길이다.

 

정말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만으로 사는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상 항상 소수였다.

종교 개혁자들도 그 당시에 많은 교인들 중 극히 소수였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교회 개혁을 말할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도 개혁에 실패하고(청교도들의 무리수와 백성들의 변심), 왕정이 복고 되었을 때,

스스로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해 교구를 포기한 사람들은 2천명, 5분의 1이었다.

그래도 청교도 시대였기 때문에, 진리가 살아 역사하던 시대 였기에 그 수가 되었다.

 

다수인 5분의 4에 해당하는 목사들은 카톨릭의 정책에 찬동하며 기득권을 누렸다.

진리와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내 생활의 안위와 기득권의 유지가 그들에게 우선적인 것이었다.

생명 팔아 거머쥔 영화가 영혼을 멸망으로 끝나게 한다.

 

주님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은 목숨을 걸고 영혼을 걸고 가는 길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 자취를 따라가는 길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8:35-37)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목숨이다.

그 목숨은 그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목숨이 아니지요

그렇게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오히려 잃고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크고 넓은 것 다수가 가는 길 부러워하지 마시고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로 가시기 바란다.

크고 넓은 길을 좋아하는 다수들은 죽은 시체처럼 시대의 대세를 따라 흘러흘러 내려 가지만,

좁고 협착한 길을 좇는 생명있는 소수들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다.

죽은 고래는 떠내려 가도, 살아 있는 멸치는 죽음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다.

 

나사로를 향해 불꽃 가운데서 혀를 서늘하게 해줄 물 한 방울 구하는 부자 신세가 되지 말자.

천국 복음이 전파되고 받아들이는 작고 협착한 소수, 거지 나사로가 되시기 바란다.

거지 나사로가 누구인가?

죄수 신세의 요셉, 늙은 목동 신세의 모세, 적국에서 망명자 신세의 다윗이었다.

 

하나님은 때가 되니까 거지 나사로들을 통해 속히 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고,

그들을 속히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심은 작은 가지, 거지 나사로들이었다.

때가 되니까 하나님은 그 작은 가지가 천을 이루게 하시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게 하셨다. 그것도 속히 그 일을 이루셨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남은 소수자들만 구원하여 오셨다.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 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남은 자들만 구원하셨다.

좁고 협착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 자들만 택하셨고 구원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지금도 여기서 이루실 것이다.

 

2 거짓 선지자들이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주범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7:15-16)

 

큰 문, 넓은 길로,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주범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거짓 선지자들 제사장들이요, 지금은 거짓 목사들, 거짓 신학자들이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거짓 왕들이 대부분이었고, 참 왕들은 손에 꼽히는 정도였다.

 

선지자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말씀에 이것 저것 섞어서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것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바울과 같은 성령이 충만한 시대에도 교회들은 순전한 말씀보다 혼잡한 말씀을 더 좋아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지혜와 철학으로 섞었다는 것이다.

순전한 말씀으로 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찌 감히 세상의 철학과 귀신의 가르침이 섞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신다는 말씀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씀에 더하면 재앙을 더하실 것이고,

제하면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신다고 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씀이 우리 시대에도 꼭 들어맞는 말씀이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0-31)

 

지금 이 땅에서 무섭고 놀라운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설교한다는 것이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철학과 심리학과 경영학들을 섞어서 가르친다는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23:14-17)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무섭고 놀라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다스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무슨 돈과 소유를 그렇게들 많이 가지고 있는지 그 권력으로 교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던 대제사장들이었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음란과 친한 친구가 되게 마련이다.

음부의 권세 지배를 받아 바벨탑 성전을 건축하고 재물에 대한 비리와 간음의 추태를 낳고 있다.

 

그 다음의 무섭고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내 백성들이 하는 일이다.

이 백성들이 누구인가? 오늘의 교인들이지요,

그런데 그 교인들이 그 목사들의 거짓 설교를 좋게 여기고

그 목사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이다.

 

목사를 하늘처럼 교황처럼 받들고, 충성을 맹세하고, 반대자들은 권력으로 다스려 버린다.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 설교, 혼잡한 설교와 권력이 지배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장사하는 자들의 집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후2:17 말씀과 렘5:30-31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 세대를 분별하고 말씀을 분별하는 책임과 권한이 우리 각 사람에게 달려 있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첫째가 성경의 충족성과 우월성, 둘째가 자기 판단의 권한,

셋째가 이신칭의의 원리이다.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충족성과, 모든 지혜와 사상은 성경에 굴복해야 한다는 우월성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인 각 사람은 개혁의 두 번째 원리인 개인적 판단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개인적 판단의 권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자기 앞에 종교적인 진리로서 제시된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 여부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개인적 판단의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만이 이신칭의의 원리에 서서 요지 부동하게 된다.

 

목사를 마치 교황처럼 만들지 말고 스스로 진리의 샘을 파서 분별해야 한다.

자기 교회만 천국교회인양 착각하지 말고 진리가 교회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진리 없는 평화, 진리 없는 사랑은 거짓 평화, 거짓 사랑, 마귀의 평화, 사랑일 뿐이다.

거짓 목사들에게 속지 않을려면, 성경을 연구해서,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짓지 않는 개와 잠에 취한 목자와 양은 늑대와 강도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이다.

 

3 열매를 보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탈을 쓰고 온갖 감언이설로 속이고 유혹하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리의 본성은 나중에 노략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

 

화려한 학력과 이력, 능수능란하고 설득력 있는 언변과 지식,

선하고 양심적이고 부드러운 성품 등의 겉 모습에, 양 같은 모습에, 넘어가면 안 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하셨다(10:16).

 

그들의 양 같은 왜양이 아니라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7-2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하시고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고 하신다.

성경 지식으로 철저하게 무장해서, 자기 판단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그럴싸한 왜양, 세상이 알아주는 조건이 아니라, 그들이 맺는 열매를 잘 보고 분별해야 한다.

 

주님은 그 당시의 제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맹인 인도자라고 하셨다.

맹인 선지자들을 따라가서 구덩이에 함께 빠지고서 후회해 봐야 때는 늦으리이다.

성품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는지, 육체의 열매를 맺는지 보고 나무를 분별해야 한다.

 

좋은 나무라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심판하는 날,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의 열매, 거짓 선지자들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못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맹목적인 충성파들이, 제자파들이,

목사를 옹호하고 추종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그들이 반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비겁하게 핑계 대고 자기 판단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관용도 사랑도 아니고, 진리에 대한 반역이요 성경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나쁜 나무에 열매에 동참하는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교회가 이토록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목사와 교인들이 종교개혁의 3대원리를 버렸기 때문이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