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족의 특징은 십자가와 평안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피로 뿌림을 받고 같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며,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방언을 사용하며, 동일한 소망과 동일한 기업의 후사에 속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나라를 통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감정과 행동의 동질성은, 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분과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이 한가족임을 보여 주는 가장 독특하고도 진정한 요소는 ‘십자가를 진 자(cross-bearers)’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한가족이라는 확실한 표시이다. 그들 모두가 십자가를 지고 있으며, 그것을 부끄러워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한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죽은 자가 되었으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을 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우며, 때로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 십자가는 그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수치와 슬픔을 보여 준다.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를 짊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에 못 박히기도 한다. 우리는 처음 주님을 믿고 영접한 때부터 십자가를 떠맡았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문을 나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진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피하려 하는가? 왜 그분을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자신도 지는 척 흉내만 내려고 하는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보다 존귀하고도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세상은 그것을 비웃고 멸시하지만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야말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된다. “오, 그리스도의 복된 십자가여, 당신의 십자가에 비할 만한 것은 없도다!” 한 성도의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하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십자가는 그분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표시로서,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따를 수 없다. 성도와 십자가는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놓았으며, 사람은 결코 그것을 나눌 수 없다. 십자가가 없으면 성도도 없다. 십자가가 없으면 아들도 없다.
우리는 평생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며,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당한 수치를 견뎌내야 하며, 그분의 수치로 옷 입은 영광을 누려야 한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못 박아야 하며, 모든 지체는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의 옛사람은 수치를 당해야 한다. 사탄의 지배를 벗어났음에도 아직도 육이 살아 있는 자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치욕의 언덕에 오르신 것처럼, 버림받은 자요 죄인으로서 세상 앞에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친히 십자가를 지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을 지고 나를 위해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견디어라. 이것을 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 이것을 지고 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말고 감옥이든 형장이든 가라. 끝까지 나를 따라와 쇠하지 않는 면류관을 받으라. 십자가를 지고 수치를 견디는 법을 배우라”
십자가는 그분의 삶 전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장면일 뿐이다. 그분은 구유에 누이신 그 순간부터 이미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일생 동안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셨다. 그분의 한평생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순례의 길이었을 뿐이다. 골고다로 향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분의 모든 삶은 수치와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그분은 평생 고난의 삶을 사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이러한 고난의 결정체였다.
예수님은 질고를 아셨다. 그분은 33년 동안 날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질고를 알아 가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백성 역시 매일의 경험을 통하여 질고를 알아 가야 한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며, 종이 상전보다 높을 수 없다. 그분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본보기이자 전형이 되신다.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타나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그분은 우리의 맏형이시며,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의 특징을 명백히 알았다면, 이제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마치 우리 앞에 놓인 보석과 같이, 승리의 면류관과 같이 여겨 끝까지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롱과 멸시로 얼룩진 자색 옷은 주님보다는 우리가 입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태초부터 에덴에서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발꿈치의 상처이다. 사실 이것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인자의 특징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 상처는 단지 걸려 넘어지는 ‘거치는 돌’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메시야의 흔적이 이스라엘이 그분을 버리도록 만든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입은 상처로 인해 기쁨을 누린다. 우리는 발꿈치에 상처를 가진 그분을 사랑한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따르며, 그 상처를 하나님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표시로서 깊이 새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서의 이와 유사한 상처를 찾는다. 우리는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앞서 간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상처를 경험하였다. 우리는 결코 그들보다 낫지 않다. 말세의 군병이 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의 군대가 6천 년간 영광스럽게 여겼던 군복을 입기를 주저하면 되겠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진정한 자녀의 흔적으로서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가족의 특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으로 보았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를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징계는 우리가 합법적이고도 영광스럽게 태어났다는 가장 중요한 흔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특징이 우리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부족한 것이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 있는 자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자녀로 인정하는 보증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증해 준다는 생각은 실로 우리의 모든 여정을 밝게 한다.
우리는 내적 기쁨,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가족에게만 허락된 기쁨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외적 기쁨과 편리함과 풍요, 그리고 의미 없는 세속적 유대나 눈물을 모르는 눈은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본향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통과해야 하는 폭풍 속에는 이 땅의 어떤 폭풍도 근접할 수 없는 참으로 깊은 평안이 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환난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는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이야말로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게 하는 독특한 요소이다. 비록 눈물로 흐려졌으나 그들의 눈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다. 비록 깊은 시름과 사색에 잠겨 있으나 그들에게는 한없는 평안이 넘쳐난다. 비록 먹구름이 그들을 덮고 있으나 그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강 같은 평안’이 넘쳐 흐른다. 그것은 호수처럼 고여 있거나 바닷물처럼 요동하지 않고 깊은 수로를 통해 강처럼 조용히 흐른다. 우리는 이 평안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십자가를 감출 수 없듯이 이러한 평안을 숨길 수는 없다. 우리는 십자가와 평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야 하며, 이 둘이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평안을 우리의 삶 속에 더욱 풍성하고도 깊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평안은 마치 소나기 위에 떠있는 무지개와 같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여호와의 빛이 우리의 영혼 위에 머무르는 한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의로운 행위는 평안을 가져오며, 의의 결과는 영원한 확신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 호라티우스 보나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pp 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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