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12장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 (2017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6. 1. 09:31

12장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회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0-11)

 

11절 말씀으로 로마서 5장의 전반부가 끝난다. 바울은 11절을 이뿐 아니라’(not only so)라는 말로 시작하여 내가 말해 왔던 모든 것이 진리이지만 그 외에 다른 것도 진리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나니”, 3절에서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와 같은 표현이다. 이 말의 가장 좋은 번역은 자랑한다이다. 차이가 나는 것은, 2,3절은 이생과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것을 기대하고 자랑하는 것이고, 11절의 자랑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자랑을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 “사람의 최고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바로 11절 말씀에서 나오는 즐거워한다의 의미이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라.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33:1,3)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찬송하라(103:1)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네(1:46-47) 마리아 찬가

 

그분을 자랑하는 필연적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 점을 권면 형식으로 그러면서도 사실상은 명령조로 말하고 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규범이고 참된 기독교 신앙의 표지이다. 주를 항상 기뻐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10절에서 그의 피와 그의 죽음이다. 이점에 대해서 물러설 수도 없고 또 이 일은 어떠한 변명이나 증거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 즐거워하지 못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이신칭의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나 노력 선행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찬양은 자신들을 향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다.

 

둘째, 첫 번째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신의 공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신칭의에 관한 몇 가지 사상은 알고 있으나 아직도 자기들이 그것에다 무엇을 보충해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공로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랑할 수 없다.

 

셋째, 또한 우리 자신들의 검은 마음과 악한 성질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은 진수와 같이 중차대한 일이다. 우리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보는 데 온통 시간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 이와 반대로 자기 자신의 본성의 비열함과 어리석음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쾌활하고도 경박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짓된 기쁨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보다는 낫다. 죄와 어두운 면만을 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진 사역의 완전성과 충족성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는 전체성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너무나 겉핥기식이다. 성경을 성급하고 엉성하게 읽어치우는 것은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한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것들을 시간을 들여서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한다. 현대적인 그리스도인과 옛 그리스도인의 차이이다. 그들은 주를 기뻐하는 것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그저 영적인 쾌락만을 갈망하여 다른 사람의 간증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본질과 그의 존재 그의 성품 그가 행하신 일을 숙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성경을 충분히 연구하고 자세히 추리하여 추론을 끌어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믿음생활에서 논리와 논증은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옛사람에 속한 이성이나 논증이 아니다.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부터 나온 신앙에 이르는 합리이다. 신앙을 무시하고 이성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그로부터 그의 추론을 끌어내는 것이 믿음이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담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나갔다. 논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므로 믿음을 행사했다. 논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는 것은 가정이 아니고 다만 믿음을 행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인도해주는 위대한 계시로부터 추리하거나 추론하여 논리적 귀결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해한 적이 없거나 우리가 참으로 그것을 인식하기조차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과 확신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해 명확하지 못하거나 무언가 보다 잘못된 것이 그에게 있기 마련이다. 그는 진리를 나타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부끄러운 줄을 알라!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 확신한다는 것은 오만이 아니며 기뻐하지 않는다고 겸손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했다(6-8). 그러면서도 9-11절에서 놀랍게도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라.

 

자신에 대해서 전혀 소망이 없음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한다. 그리고 자기의 구원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값없는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겸손과 기쁨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겸손과 기쁨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지 정반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난 거짓되이 기뻐하는 것이 두려워, 그리고 오만해지면 어떡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오해한 사람이다. 참된 자기 검증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준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완성된 사역을 알게 되고 결국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기검증이 기쁨으로 끝나지 못한다면 그것을 그릇되고 거짓된 검증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양면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서만 멈추지 말고 비참함과 실패와 절망의 땅과 진흙 구덩이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그를 바라보라. 하늘을 보고 그를 자랑하고 그의 영광스런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하늘보좌 그리고 그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의 영광스런 나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아드님은 오셔서 사역을 완전히 마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전부터 계획하셨다가 시간 세계에서 실현하실 구원을 적용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성부께 영광, 성자께 영광, 성령께 영광. 위대한 여호와 삼위일체께 영광 영광 영원토록. 아멘.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