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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조계광역, 규장, 2009

강대식 2017. 8. 18. 11:41


찬송, “세상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는 우리가 시련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복을 상기하면 넉넉히 이길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8-1691)<하나님의 섭리>(The Mystery of Providence)에 대해 자신의 피와 살로써 증거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적임자였다. 그는 청교도로서 한때는 목사직에서 파면당하여 교회 강단에 설 수 없어서 숲속에서, 벌판에서 소수의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핍박을 받는 가운데, 고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섭리를 맛볼 수 있었다.

 

플라벨과 동시대인인 영국의 왕당파 역사가인 우드조차도 플라벨은 존 오웬이나 리처드 백스터보다도 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플라벨의 친구였던 존 겔핀은 자신의 플라벨 회고록에서 그의 세 가지 특성, 즉 근면성, 복음전도의 열정, 자상한 성품에 주목했다.

플라벨은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1820, 그의 글들을 모아 모두 여섯 권으로 된 전집이 간행되기도 했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실천을 강조한 그의 책은 영혼을 고치는 의사로서 그가 지닌 탁월한 역량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섭리>1678년 초판 발행됐다. 발행된 지 300여년이나 흘렀지만 섭리에 대해서, 이 책 이상 탁월한 책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종합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적용에 뛰어나다. 가히 '섭리에 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안겨줄 것이다.

플라벨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면서 이론적인 강론을 늘어 놓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온 마음을 기울여 감동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역설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섭리를 체험한 자신의 경험과 교회사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적용하는 방법에 정통하다. 그는 성도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의심이나 과도한 신비주의에 조금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의 설명은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성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믿음의 열정을 활활 불타오르게 한다. 우리는 먼저 만사가 우리의 뜻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지금은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일에 열심히 협력해야 한다.

이 책 <하나님의 섭리>는 읽기 쉽지만 깊은 생각을 자극하고, 성경적인 초점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현재 역사하심에 대한 면밀한 의식을 갖게 한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격변의 세대에 씌어졌던 이 책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무게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 바닥의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워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잊지 않게 될 것이며, 현재의 고난도 넉넉히 이길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존 플라벨의 <하나님의 섭리>가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복을 세어보게 하여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더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을 응원하시는 하늘 하나님의 응원가를 들어보라 !

(pp 4-9,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목사의 서문)

 

회심은 하나님의 섭리의 가장 큰 축복

 

회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제공하는 가장 큰 축복이다. 이 세상에서 섭리가 그 영광스러운 빛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는 때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심을 돕는 기회와 수단과 도구로서 작용할 때이다. 야곱은 벧엘에서의 하룻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48:3). 야곱처럼 다른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벧엘이 존재한다.

회심은 두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젊었을 때는 악하고 불경스러운 삶을 일삼다가 나이가 들어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한 신앙 교육을 통해 비교적 심령이 부드러운 어린 시절부터 뚜렷한 징후 없이 알게 모르게 신앙을 갖게 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조명, 책망, 자복, 그리스도의 영접, 보증과 같은 성령님의 뚜렷한 사역이 동반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징후가 불투명하거나 얼른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구원 사역의 실재와 증거가 명백한 이상, 회심 당시의 상황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가 회심을 유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은혜로우며 매혹적이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순간 빌립이 나타나, 그의 병거에 함께 올라탄 뒤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섭리는 그런 상황을 마련해 내시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8:26-30).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왕하5:1-4).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아 왔다. 나아만의 아내는 그 아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

 

멜키어 애덤스의 <유니우스의 생애>를 보면, 젊은 시절의 유니우스는 악명 높은 무신론자였다.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대중 폭동 때 그는 목숨을 부지하는 사건을 겪었다. 그 일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후 집으로 돌아간 유니우스에게 그의 아버지는 성경을 읽어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한 그는 성경을 읽는 동안 초자연적인 권세와 능력이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는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기에 이르렀다.

 

라바터는 독일과 전쟁을 치렀던 스페인 군사들 중 많은 수가 독일 도시와 마을의 경건한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전한다. 로버트 볼턴(1527-1631, 영국 청교도 설교자이자 고전학자)은 휼륭한 학자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경건한 신자들을 비웃던 불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건한 피콕(Peacock)과 어울리면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유능한 일꾼이 되었다. 때로는 우연히 눈에 띈 종이 한 장도 회심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웨일스에 살던 한 목회자의 경우가 그랬다. 시장의 노점상이 싸 준 포장지가 퍼킨스의 <요리문답>의 한 장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 한 두 줄의 글귀를 읽고 결국에는 회심을 경험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루터의 책을 읽고 회심을 경험한 독일 목회자가 많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목회자의 망각이나 실수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회심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어거스틴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던 도중에 본래 준비했던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처음 의도와는 달리 마니교의 잘못을 논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 가운데 피르무스라는 사람을 회심시켰다. 그는 어거스틴의 발 앞에 엎드려 오랫동안 마니교를 섬겨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경건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간수의 영혼이 구원받게 된 경우도 있다. 경건한 목회자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덕분에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 덕분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장난삼아 설교를 들으러 갔다가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사탄의 악의와 인간의 사악함을 통해 영혼을 회심시키기도 한다. 나는 그 일을 직접 목격하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했다.

 

1673, 다트머스 항구에 버지니아로부터 이라는 이름의 배 한 척이 입항했다. 배에는 스물셋의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그 배의 외과의사였다. 그는 항해 도중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마귀는 우울증을 이용해 그 가엾은 청년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자살 충동을 억제하셨다. 그러나 주일 새벽에 형제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준비했던 칼을 꺼내 자기의 목을 그었다. 목의 상처만 해도 깊고 컸는데 비참한 삶을 확실하게 끝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또 다시 칼을 뱃속에 쑤셔 넣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나뒹굴었고, 잠에서 깨어난 그의 형제는 황급히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했다. 급히 달려온 의사들은 목의 상처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목의 상처를 꿰맨 뒤 깁스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나는 그가 몇 분 안에 숨을 거둘 줄 알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볼 요량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다른 무엇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당신의 현재 심정을 간단히 말해주세요.”

그는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성경이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그런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자살은 모든 살인 중에서도 가장 중한 범죄에 해당했다.

 

그는 자신의 헛된 희망을 포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심령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와 불행을 한탄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살은 큰 죄이지만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주시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회개와 믿음이 본질과 그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내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더니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며, 나에게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와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의 마음을 녹여주셨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다시금 간단히 요약해주고 방문을 나섰다.

나는 이제 세상에서는 그를 두 번 다시 못 볼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하루 종일 죽지 않고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했다. 그리스도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믿음에 관한 가르침을 요구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주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죄와 다른 모든 죄를 뉘우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어요.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죄가 얼마나 악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혐오스럽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는 너무나도 더러운 죄인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주님, 저의 불신앙을 용서해 주소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자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한 저를 과연 용서해 주실까요?”

 

그리스도의 보혈은 심지어 그분을 죽인 사람들의 죄도 덮어 줍니다. 그들의 죄는 당신의 죄보다 훨씬 큰 죄였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뜻대로 처리해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와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의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 의사들의 소견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의 그의 요청에 따라 다시 그를 방문했다. 그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다. 나는 그와 함께 기도했다. 그때 복부에 난 상처가 벌어졌다. 상처 구멍으로 위장이 검푸르게 변색되어 불거져 나온 데다 그 마저 칼에 베인 상태였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사는 위장의 상처를 꿰매고 온습포로 처치한 뒤 다시 몸 안으로 밀어 넣고 피부를 봉합했다. 그러고는 그의 운명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다. 놀랍게도 목에 난 상처와 복부에 난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 그리고 육체의 상처보다 더 위험했던 영혼의 죄까지 온전히 치유되었다. 나는 그가 회복되는 동안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통해 죄인들의 영혼을 각성시켜 영적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을 물론, 그러한 깨달음을 완전한 상태로 이끄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11:33).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레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26:14)

회심의 날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막중한 은혜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는 건강과 부귀와 명예와 즐거움을 허락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구원을 허락한다. 세상에는 섭리를 통한 온갖 축복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원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귀하다. 구원의 은혜는 가장 크고 힘든 어려움을 뚫고 주어지는 은혜 중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1:19,20).

 

구원의 은혜는 황금이 발 밑의 흙보다 귀한 것처럼 다른 모든 은혜에 비해 질적으로 탁월하다(3:18).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서 비롯된다. 구원의 은혜는 구원을 확실히 보장한다. 회심했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앞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확실한 표징이다(6:9).

구원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이다. 이 은혜는 부모, 남편과 아내, 자녀, 재산, 명예, 건강, 심지어는 생명이 사라져도 영원히 머물러 있다(4:14).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일을 특별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구원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목회자들과 하늘의 모든 천사들조차도 행할 수 없는 사역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구원의 섭리와 관련된 것이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3, pp 67-94)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라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허락하신 직업과 지위에 만족하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직접 선택하는 것보다 우리의 영원한 행복에 더 적합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게으르고 무익하고 부패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젊었을 때 적절한 직업을 갖도록 유도한다. 노동은 죄의 결과이지만(3:19),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죄가 더욱 증폭된다. 부지런히 일을 하면 유혹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줄 뿐 아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20:35)라는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직업 활동을 할 때는 우리의 적성에 맞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의롭고 합법적인 직업 활동에 종사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은혜가 아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모는 물론 우리 자신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던 직업 소명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직업을 바꾸다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직업을 선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다윗은 어린 시절 양떼를 돌보면서 한 번도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더 나은 양떼, 즉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목자로 삼으셨다(78:70,71). 안드레는 처음에는 어부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더 큰 소명을 허락하셨다(4:18,19).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를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1:10)라는 사탄의 말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재산이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모세는 유다 지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33:7).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고려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삶의 조건을 허락한다.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면 오히려 스스로를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생계에 꼭 필요한 물질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라는 말씀을 기억하자. 시편기자는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37:16)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축복을 베풀어 주셨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축복을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몇 가지 경고를 한다.

 

직업 활동에 게으르고 나태하지 말라. 게으른 사람은 정직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직업 활동에만 전념하고 일반 소명을 등한시하는 잘못을 피하라. 세상일에 분주하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라는 경고를 잊지 말라. 세네카는 말했다 나는 일에 나를 온전히 내주지 않고 단지 빌려줄 뿐이다”. 직업 활동으로 성공을 이뤘다면 부지런히 일한 결과라기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라.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8:18)라고 말씀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37:4,5)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모든 일을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하라.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허락하신 직업과 지위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말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직접 선택하는 것보다 우리의 영원한 행복에 더 적합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pp 95-105)

 

섭리의 손길이 거룩의 길로 이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세상의 위로를 빼앗거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전부, 또는 일부를 제거해 세상을 향한 욕망을 억제하도록 도와준다. 성화의 사역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섭리이다. 성령님은 성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시다. 성화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에 달려 있으며, 성령님 없이는 그 어떤 섭리도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섭리가 성령님의 축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할지라도, 성화의 사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외적 상황을 섭리하시어 성령님의 사역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섭리와 성령님의 사역은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그 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서로 합력한다.

 

성령님은 섭리의 수레바퀴 안에 거하시며 그 방향을 인도하신다(1:20). 따라서 성령님과 섭리는 서로 뜻을 같이해 함께 움직인다. 성령님의 내적 사역은 성도 안에서 죄를 죽이는 것이며, 외적 섭리는 그러한 성령님의 뜻에 조력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위를 율법의 울타리로 두르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지키고자 하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뜻을 거스르려는 성향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실 목적으로 섭리를 베푸신다. 성령님은 죄의 성향을 억제하시고, 섭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죄의 길로 치우치려는 우리를 방해한다(33:17-19). 예를 들면, 육신의 질병이 죄를 예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실은 만성 두통에 시달렸다. 그는 하나님께 두통에서 자유롭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지만 두통에서 벗어나자마자 육신의 정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두통을 앓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죄의 더러운 본성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단지 고통에 못 이겨 죄를 삼가는 것은 정말이지 훌륭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경건한 신자는 그보다는 좀 더 고귀하고 고상한 동기를 지닌다.

 

고통의 섭리는 유혹의 오염으로부터 신자를 정결하고 깨끗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27:8,9). 고통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영혼에게 복된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실 목적으로 섭리를 베푸시어, 우리가 지나치게 사랑하는 피조물을 거두어 가시거나 고통을 바꾸어 괴로움을 주신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피조물에게서 기쁨을 얻도록 이끌며, 희망차고 장래성 있는 세상의 일들에서 삶의 만족을 찾도록 유도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악인들의 이에 씹히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악인들, 곧 불과 홍수와 짐승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다(124). 충만한 섭리를 베푸시어 하나님의 교회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pp 141-161)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라!

 

성도는 늘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야 하는데, 특히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 더욱 그래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자비이든 심판이든 간에 상관없이 섭리의 사역은 무엇이나 깊이 묵상하라고 요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신한 대가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은 모두 제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실로에 가서 그분이 행하신 심판을 깊이 묵상하라고 명령하셨다(7:12). 또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6:5)라는 말씀처럼 자비를 베푸신 섭리에 대해서도 깊은 묵상을 요구하셨다.

 

이 말씀은 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으면 나의 의로움은 가려지고 너의 불의는 들어나리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섭리의 묵상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이다(6:28).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경솔하고 부주의한 태도를 싫어하신다.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66:5). 섭리의 사역에 온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찬양을 올려드릴 수 없다. 찬양과 감사는 섭리의 사역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비롯된다. 묵상이 없으면 찬양과 감사도 있을 수 없다.

 

시편 107편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섭리를 길게 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4-6), 감옥에 갇힌 죄수들(10-12), 질병으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17-19),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23), 기근을 당하는 사람들(33-40)에게 섭리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큰 변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일이 개입하시어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신다(40,41). 이 시의 매 단락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고 찬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라는 마지막 섭리에 대한 묵상이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섭리에 대한 묵상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지탱해주는 믿음의 양식이다. 예를 들어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74:14)라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용기를 격려한다. 성도는 과거의 섭리를 기억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섭리를 의지할 수 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17:37)라고 말했고, 바울도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1:10)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경우에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16:9)라는 말씀대로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죄의 용서를 빌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섭리에 의지해 구하옵나니--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14:19)라고 기도했다. 교회도 모세가 새로운 은혜를 구했던 것처럼, 과거의 섭리에 근거해 새로운 섭리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51:9,10).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시하는 죄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3:5)라는 말씀과 같이 심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도다”(145:18)라는 말씀처럼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징계하실 때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고(9:7), 구원을 베푸실 때도 우리에게 다가오신다(106:4).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한다(10:12).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아침마다 -- 분초마다”(7:18)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등한시하는 것은 그분을 멸시하는 가증스런 죄에 해당한다(1:3,3:2). 사람도 자신의 존경하는 사람은 등한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나 심판에 무관심한 것은 악인의 특징이다(5:3).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상황을 올바로 하나님께 아뢸 수 없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때로는 감사를 드리는 기도가,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26:8)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고(2:1,2,4:12), 때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때로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12:1,2). 다윗의 시들이 각각 주제가 다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때마다 깊이 묵상했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곧 성도의 의무이다. (pp 164-171)

  섭리의 은혜를 기억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라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섭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크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경험을 신앙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모든 신자가 시간을 내어 신앙일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일지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친다.

 

신자들이 서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섭리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해두고, 또 직접 경험한 섭리까지 더해둔다면 참으로 보물과 같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순간 우리의 삶과 자유와 관심사에 영향을 미친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한 물질도, 안전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섭리를 통해 받은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은 쉽게 파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문자화된 기억력은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추억을 잃는 것에 비하면, 금은이나 토지나 가재도구를 잃는 것은 그다지 큰 손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귀한 보물을 신앙일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잘 간수하라. 그리고 새로운 문제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전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나? 이것이 처음 있는 시련인가? 아삽이 그랬던 것처럼(77:5) 옛날 일들을 떠올려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앙일지를 들춰보라.

현재의 시련과 위험만 크게 보고, 과거의 시련과 위험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항상 다음에 닥치는 시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에게 육지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래된 경험일수록 그런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위험이나 두려움도 현재의 그것들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pp 372-375)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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