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서문강역, 청교도신앙사, 2011

강대식 2017. 8. 18. 11:43


역자 서문

교회사에 주어진 영적인 고전들은 다 성경을 가르치신 성령님의 가르치심의 열매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사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두드러진 시대와 그 시대들에서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역과 그 열매로서의 저작에 지대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 문입니다.

 

본서는 대표적인 청교도 목회자요 신학자였던 저자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영적인 은혜와 은사를 총동원하여 성령의 검인 성경 말씀을 연구하여 낸 최대의 걸작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른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와 높이와 그 영광, 그리고 그 구속의 효력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신비한 방식과 그에 준한 경건의 실천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조감적인 눈으로 살피며 그 은혜의 신비 앞에 감격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독자에게 드리는 저자의 편지

독자 여러분, 우리에게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동참하는 일을 가장 확실하게 하는 일입니다. 일단 그 은택을 입으면 여러분은 풍랑을 만나도 담대한 얼굴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너희 고통과 곤란이나 손실이나 시련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나 죽음이여 올지어다. 내가 너희를 대비하여 준비하였노라. 너희가 아무리 악하게 굴어도 내게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도다. 바람아, 불테면 불어라. 벼락아 칠테면 쳐 보아라. 비와 우박이여, 너희가 아무리 세차게 나를 후려쳐도 내 머리 위에 좋은 지붕이 있으며 나를 위하여 평온한 거처가 준비되어 있구나!”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33:16).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이루는 강론의 목적은 바로 이 큰 일에 여러분을 돕는 데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잘 관찰하여 말한 것과 같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속성들과 약속들 안에 거처를 정하라.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들을 자주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들과 약속들에 동참하는 일을 확실하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세우신 규례들이 여러분을 떠나게 되는 어두운 날에 그리로 피하여 숨을 수 있도다.” 저는 우리 잉글랜드의 역사 속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세버른 강이 넘쳐 섬머셋숴의 지경까지 흘러 들어왔을 때, 개와 야생토끼와 고양이들과 생쥐들이 자기들에게 일반으로 닥쳐오는 죽음을 피하려고 서둘러 물이 침범할 수 없는 높은 언덕으로 헤엄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모두에게 닥친 위험이 지나기까지 서로 싸우지 않고 아주 조용히 함께 있었습니다. 서로들 간에 생태적 본능으로 일어나는 반감이 분출될 만도 한데 그런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적용될 만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로 이 땅을 치시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들의 마음이 자녀들에게 향하고 자녀들의 마음이 아버지들에게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골방에 가서 더 시간을 자주 보내며 무릎을 꿇고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세밀하게 시험하고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자기 마음을 키질 하십시오. 날이 겨와 같이 날아가고 주님의 맹렬한 분노가 여러분에게 임하기 전에 말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자신의 마음을 탐사하고 자신의 조건들의 참된 발견을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 이 책을 통한 제 미력이 그 목적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종된 제 무가치한 수고에 큰 상급이 될 것입니다.

 

출판사 소개의 글

비국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투옥되어 옥중에서 순교한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포드의 유니버시티 대학을 졸업하고 데본의 다트머쓰에서 거의 평생을 목회하였다. 그는 청교도 전통의 모든 특성들을 자기 목회사역에 적용한 목사로서 설교는 이를 가는 것 같은 열심’(hissing hot)과 함께 마음을 탐사하는 성경강해여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플라벨은 자신에게 허락된 능력을 극대화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가르치고 그 마음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청교도 설교자들 중에 그보다 학식이 높은 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손에서 여러 방면에 쓰임새를 보이는 면에서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의 전작집(全作集)이 여러 차례 재판된 것은 그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18세기에 다섯 차례, 19세기에 적어도 세 차례의 재판을 거듭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18세기에 미국의 영적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 영성에 있어서 존 번연과 매튜 헨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국의 조지 휫필드, 그리고 19세기에 로버트 맥체인과 앤드류 보나와 같은 스코틀랜드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 플라벨의 저작들을 극찬하고 애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요점은 플라벨의 저작들은 여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정들 속에서 그 영적 호소력과 감화력을 계속 뿜어내 왔다는 것이다. 19세기 프린스톤 신학교 초대 교장인 아춰벌드 알렉산더가 십대에 그의 책을 읽고 회심하였는데, 말년에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분명하게 말하여 그 어떤 영감있는 저자보다 더 충일한 이 존 플라벨에게 더 많은 빚을 졌다.”

    를 적용하는 방식과 지혜와 거룩을 적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적용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칭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relative change)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단번에 성취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혜와 거룩함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시는 일은 다릅니다. 완전한 거룩을 이루기까지 느리고 점진적인 단계를 거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한 내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4:18).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알게 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아침의 빛같이 영혼 속에서 자라갑니다. 우리가 다 자란 식물을 보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거룩함의 성장도 그러합니다. 영적인 습관의 뿌리는 계속 자라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내면적 성장은 그리스도와 관계틀 더욱 친밀하게 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향유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와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하심은 각각 전가’(轉嫁, imputation), ‘새롭게 하심’(renovation), ‘영화’(glorification)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전가의 방식으로 , ‘새롭게 하심으로지혜와 거룩을, ‘영화의 방식으로 구속하심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의는 전가’(전달)의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전가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죄가 된 것처럼,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의 역시 전가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5:17). 우리가 구속주의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일은 오직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고후5: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한 방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믿음의 후손인 우리 역시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4:22,23).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혜거룩함’(성화)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는 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대표자의 원리 가운데 우리에게 전가된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지혜거룩함나누어 주시는’(imparting)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조명(照明)과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혜거룩함의 은혜가 우리 인격의 실제적인 소유로 자리잡도록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전에 부패가 거하던 자리에 은혜가 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칭의의 경우에서처럼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영혼과 몸에 남아 있는 죄의 잔재들로부터 우리가 완전하게 구출되는 구속’(救贖, redemption)의 역사가 일어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까지 죄의 효력은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장차 영화(榮化)로워질 것입니다. 죄가 우리 영혼에 가져다준 모든 비참함에서 우리가 완전한 자유함을 얻는 날이 올 것입니다(5:26,27). 성령의 역사를 통해 거듭남을 입은 사람들에 한해서 말입니다. (pp 32-35)

    칭의는 방종을 가리는 덥개가 아니다

 

저는 여러분이 칭의성화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기며 복음을 능멸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을 의()와 분리시키는 사람들(육적인 삶을 살아간다 해도 자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성화에 힘쓰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방종을 가리는 덮개쯤으로 여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성화(聖化)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룩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칭의와 성화가 서로 별개의 것이라면 성결은 필요치 않습니다. 성화는 우리 영혼의 체질과 성품을 변화시켜 하늘을 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위대하신 구속주(救贖主)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방종을 일삼는 자들은 로마서 4:5의 말씀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지만 이 말씀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게으름과 나태함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가 일을 아니할찌라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게으름과 태만함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는 사람들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길 바랬습니다. ‘일한 것이 없다라는 표현으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완벽한 순종이 아니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율법의 엄격함에 부합하기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라는 표현 역시 그러합니다. 이것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고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pp 36-37)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