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장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
- “좁은 문을 들어가라” 이것은 행동에의 초청이다.
첫째 단계는, 그 나라의 제반 원칙을 선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정과 이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순전히 지적인 것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를 요구하면서 임하는 것이다. 복음은 ‘나를 따르라, 나를 믿어라’라고 한다. 복음은 항상 결단을 요구하며 이행을 요구한다. 이것이 사활로 중대한 것임은 분명하다.
‘나는 이 삶에 내 몸을 맡겼는가? 이것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 이것이 나의 기독교 신앙고백에 대한 궁극적 시금석이다. 군에 입대하는 사람이 자기에 대한 권리와 자기 생명의 관리를 양도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의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진리를 보고 내가 진리에 대해 취해야 할 조처를 결정하고 나서, 이제 이 좁은 문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직면하는 초대의 위험의 하나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에 동의하여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그것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위험이다.
좁은 문을 찾는다는 의미는 진리를 보고 그것에 동의를 표시하고 나서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 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어렵다. 이 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여러분의 길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을 분석해보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을 정확히 발견하기까지 나는 이일을 계속 하겠다’라고 말한다.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까닭은 그들이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죠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읽어 보라. 이 사람들은 좁은 문을 찾고 있었으나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마침내 부지런히 구함으로 그들은 그것을 찾았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이 길을 걷고 있음을 분명히 알기까지 휴식이나 평안을 우리 자신에게 허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이다. 찾고 발견해야만 들어 갈 수 있다.
셋째 단계는, 여러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문을 찾아 들어 간 후에 그대로 계속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몸을 여기에 내어 맡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나는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변함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아침에 깰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나를 흑암의 나라에서 그의 나라로 옮겨주셨다. 나는 천국으로 가고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시험과 시련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이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여러분의 몸을 이것에 맡기고 이것을 계속하노라면 그 결과 여러분은 이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진리에 대해 실제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 우리 주님은 산상 설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칙이나 명령을 주시고 나서 우리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백성인 우리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공감을 보게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주께서 주신 이유들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두 가지 유형의 삶이 있다. 넓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넓은 길이 있고, 좁고 협착한 문으로 들어가 내내 좁은 길이 있다. 이 두 길의 성격을 잘 인식한다면 망서림같은 것은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칠일 중 하루를 이런 일들을 묵상하며 사람들을 공중예배로 함께 모이도록 정하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단 벗어나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삶을 잠깐 보라. 예를 들어 신문들은 최상 최악의 세속생활을 대표한다.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삶을 살펴보고 분석해 보라. 그 온갖 허례와 영화와 호사와 더불어 그 속에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결국 그처럼 철저히 헛된 것이 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삶에 무슨 진정한 만족이 있겠는가? 바울은 묻고 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 베드로는 ‘망령된 행실’이라고 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은 그처럼 천박하고 공허하다. 그들도 지성과 두뇌를 가지고 있으나 이런 가장과 현혹과 어리석음과 자기 최면의 삶을 살므로 지성과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별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 얼마나 헛된 삶인가?
그런 다음 다른 삶을 살펴보라. 이 삶이 모든 점에서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를 보라. 산상 설교를 다시 읽어보라. 얼마나 놀라운 삶인가? 신약성경은 여러분의 지성을 위해 얼마나 좋은 양식인가?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라. 얼마나 참되고 지속적인 만족을 주는가? 얼마나 윤리적이며 고무적이며 얼마나 크고 고상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광과 장려함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씀대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고후4:4)인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솔직하자.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편협되다’고 말하며 다른 삶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기독교의 삶을 본 일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 두 성격의 삶이 있다. 신약성경은 항상 이 논증을 제시한다. 자기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바보 멍텅구리이다. 여행 그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비논리적인 사람이요, 모순된 사람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 종말을 생각해봐라 너희의 목적지를 생각해 보고 이런 유의 삶이 어디로 인도될 것이지 생각해 보아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이 진저리가 난다면 그것이 여러분을 인도하는 목적지를 상기하라. 그런 다음 피상적 기쁨과 행복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노년이 되어 쇠약해졌을 때의 그들을 생각해 보라. 임종시에 그들은 공포와 고통, 파멸 외에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 다른 삶은 보다 풍요한 삶으로 인도한다. 이 삶은 새 생명과 새 전망과 새 의욕과 무엇이나 새 것을 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삶은 계속함에 따라 점점 더 크고 더 놀라운 삶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간수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되어 있다.(벧전1:4)
좁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이미 넓은 길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반대되는 것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우리가 몸을 맡기지 못한다든가 머뭇거린다면, 좁은 길 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수동적 저항도 저항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유부단이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좁은 문을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여러분보다 먼저 가신 분이 이 길에 계신다는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점차 주님처럼 되라는 초청장이다. 이 길을 갈 때 여러분은 고립되고 외롭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길에 여러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이 뒤에 남겨두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말라.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희생과 고난을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은 길 위에 계신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사람들이 본문을 고찰할 때 말하는 난제들이 있다.
첫째, 주님은 여기서 삶에 일종의 중간지대가 있다고 가르치시지 않는가? 주님은 여기서 주님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탁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
둘째,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곧 우리의 결정이요 우리의 행동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는 행함으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좁은 길 위에 있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좁은 길을 따라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뿐이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들어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넓은 길에 있음을 증명하는가? 산상 설교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점에서 실패한다. 우리는 다른 빰을 돌려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당신은 이 길을 선택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것인가? 당신은 노력하고 있는가? 당신은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이 좁은 길에 있다고 보장할 수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절대 무죄하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이생에 그와 같은 사람은 없다.
주님은 결국 ‘내 백성은 나를 따르고 싶어하는 자들, 따르려고 애를 쓰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실패한다고 해서 넓은 길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좁은 길에서도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넘어진 것을 자각하고 즉시 죄를 자백하고 인정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일1:9) 좁은 길 장면은 이 한 가지 원칙 -주와 같아지고 주와 동행하려는 의욕, 우리의 위탁, 우리의 결심, 의에 주리고 목마름 -을 강조하고 명심시키기 위한 것이다.
넷째, 그러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 받게 되어 있는가? 사람들이 어떤 날에 주께 와서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다.(눅13:23) 주님은 이 철학자들, 이 사변적인 신사들의 눈을 곧바로 들여다 보시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하나님만이 얼마나 구원 받을지 아신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께 일임하라. 우리가 할 일은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일이다.
들어가라 그러면 여러분이 구원 받은 자 가운데, 영광 받을 자 가운데, 우리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볼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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