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장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5-16)
- 주님은 15,16 절에서와 본장 말미에까지 한 가지 큰 원칙, 좁은 문으로 들어감의 중요함과 우리가 참으로 좁은 길을 걷고 있는가를 확실히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것은 13, 14절 말씀에 대한 일종의 강화이며, 이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위험과 장애와 방해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이것을 두 가지 특정 위험의 형태로 나타내셨고 그리고 나서 산상 설교를 한 집은 반석 위에, 한 집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내시며 끝을 맺으셨다. 이 세 가지의 구분의 공통점은 심판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을 일관하는 주제이다. 우리의 난제와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일반화된 경박하고 피상적인 복음전도를 설명해 주고, 우리들 대다수의 성결과 성화된 삶의 부족함을 설명해 주고 있다.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는 산상 설교를 들었다. 우리는 권면을 들었다. 주님은 ‘이 지점에서 너희가 주의해야할 것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위험이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라고 말씀 하신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본문을 놓고 두 해석으로 갈라져 있다. 한 학파는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언급하는 것이라 말하는 학파이다. 열매는 교훈과 교리이다. 또 다른 학파는 교훈과는 상관이 없으며, 그들의 삶이 문제라고 말한다. 본문은 이 두 요소를 다 포함한다. 이것은 단지 교훈의 문제로 이단적 교훈만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단적 교훈은 분별력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보면, 이것에 어려움이 있고 미묘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온다. 주님은 이런 유의 거짓 선지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는 그런 자라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바로 해석하려면 이 특정 요소를 참작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처음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갖춘 외모로 오는 사람이다.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며,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가르침은 대체로 옳고 참된 그리스도인 교사가 마땅히 사용하고 또 사용하는 용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르침이나 생활에서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가르침과 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그 속에 ‘좁은 문’이, 그 속에 ‘좁은 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옳은 것들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복음 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찬양을 받는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그를 문제 삼고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이다. 만사가 괜찮으며 잘되어 갈 것이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무서운 진상은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5:31)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의 말이 여러분을 불안케 하거나 언짢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좁은 문이나 좁은 길이나 이런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항상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그 메시지에 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그는 교리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하나님의 의와 공의나 진노와 성결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들을 말하지 않으며, 분명히 옳고 참된 것들을 말하지 않고 피한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철저한 이단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괘심하고 저주받을 일이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그들은 베드로후서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을 부정하려 애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거기 있다. 유다서나 요한일서에도 같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산상 설교에도 심판을 다루고 계신다.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암시한다. 다만 개별적이거나 어떤 특정 죄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거짓 선지자가 이러한 것을 믿고 있다고 착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는 이러한 것들을 믿고 있는가? 그들이 믿고 있다면 이러한 것을 설교하며 가르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죽음과 십자가에 대한 견해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며 우리 주님에 대해 감상에 젖기는 한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십자가 설교는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음’이 아니며,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의 철학을 통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이로운 사랑의 철학으로, 무관심한 세상 때문에 애끊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짓 선지자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 문과 천국을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존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라는 책에서 자기가 18개월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고 악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것과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개는 죄라 불리우는 것이 여러분의 속에 있음과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간다. 이것이 회개이다. 거짓 선지자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에는 관심이 없고 바리새인이 가졌던 서너 가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격하하고 집착한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을 항상 제의한다. 자기 검토에는 거의 이단이라는 느낌마저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한 그를 형제로 여기고 함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 선자자들을 삼가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가 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친절과 정중함을 성도다움으로 오인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이나 개성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해야 한다.
-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력해졌는가?
그 원인은 지난 세기의 고등비평 운동의 결과로 온 설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옹호자들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 앙양을 설교했다. 그들은 설교의 실례를 문학과 시에서 끄집어 내어왔다. 에머슨이 대제사장들 중 한사람이 된 셈이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이나 예수를 운운하고 십자가 위의 그의 죽음을 운운한다. 그래도 그들이 명백한 이단으로 인정된 일이 없다. 그들은 아무도 때려눕히는 일이 없는 막연한 메시지만을 주었다. 그들은 너무 현대적이며 최신식이어서 인기가 많다. 그 결과로 텅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이다.
만일 내가 이처럼 산상 설교를 설교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말씀들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설교는 비위에 거슬리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나 자신 이단 사냥꾼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괴짜요 괴팍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성경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다.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과 그 영원한 운명을 평가하고 값을 매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간곡히 권면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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