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장 나무와 열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난처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전후 문맥 관계 때문이다. ‘비판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계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의 흠을 들추어내서 욕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성경 구절을 주의 깊게 보아 정직하게 다루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산상 설교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를 강조하고 계신다.
- ‘나쁜’ 이 말은 ‘썩었다’는 뜻이 아니다. 썩은 나무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연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는, 서로 닮은 두 종류의 나무가 반드시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셨다. 그 뜻은 품질이 좋지 못한 열매, 보잘 것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겉모양은 거의 같지만 열매를 살펴볼 때 알 수 있는 두 종류의 나무의 비교이다. 한 종류의 열매는 쓸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격의 중심에 관계되는 것이요, 매우 중대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생활의 어느 면으로 보든 표면적인 외면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위험성이다. 이것은 가르침과 교리 면에서, 실생활에 있어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시금석으로 분별해 보면 조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 일들이 있다. 생활에서도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 새롭게 하심을 받지 못하고 그저 생활에서 어떤 것을 덧붙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려는 위험성을 여기서 지적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언제나 재앙과 위험의 원천이 되어온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 마음의 상태에 관심을 가진다. 성경에 보면 마음은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으로 되어 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12:3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 문제는 잔이나 접시의 겉을 씻는 문제가 아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자신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은 그 신앙이나 가르침에서나 교리에서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실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언제나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양성경의 가르침으로 조명을 받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식별할 수 있으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 중요한 원칙은 신앙과 실생활과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항상 드러나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념과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결국 필연적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나무마다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것을 단언하셨다.
청교도들은 그들이 ‘일시적 신사’라고 부른 사람들의 일을 길게 다루기를 좋아했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말을 하고 또 생활에 있어서도 변화된 점을 보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외모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뒤에 가서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는 명백하고 의심할 바 없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일은 부흥기간 중에 흔히 일어나곤 했다. 흔히 종교적 각성이 있을 경우 그들 자신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알지 못하지만,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에 휩쓸려 얼마동안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에 의하면 그들이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2:22) 돼지라도 깨끗이 씻기어질 수 있고 표면상으로 깨끗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씻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지만 사람을 미혹케 할 가능성이 매우 강하다. 참된 증거가 눈에 띠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참 모습을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다. 항상 조심해서 열매를 찾아보도록 우리들 자신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열매를 검사하려고 할 때에 구별하기 어려운 요소를 마음에 새겨둬야 한다. 진짜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적은, 호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고 극악무도하게 기독교의 교훈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짓 모습을 보여주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여기서 주님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내리시는 죄의 선고를 멀지 않아 받을 사람들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참된 영성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최대의 적이 되어온 것은, 가짜 모조품의 기독교였다. 우리들은 교회 밖에 있는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해서보다도, 교회 자체의 상태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한다. 기독교계의 현재의 상태의 진단을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한다.
- 여기서 몇 가지 시금석을 적용해 보면, 전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시금석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적인 시금석으로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선량하며 윤리적이며 도덕적 면에서나 개인생활 방식에서 높은 규범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순전히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좋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생래적인 것으로 타고난 그대로의 것이다.
둘째로 이 사람이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은, 그가 일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도덕적 가르침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이교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높은 표준을 가지고 그 표준에 따라서 행동한다. 교회 내부에 보다도 외부에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흔히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뛰어난 도덕성이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미 위대한 도덕적 교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들이야말로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본 바로 장본인들이다. 그것은 나쁜 열매요, 더러운 누더기이다.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요, 새로운 본성에서 나오는 것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행동의 이유나 동기를 발견하려 해야 한다.
개별적인 시금석으로 소극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그 생활의 어딘가에 침체된 곳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틀린 점은 볼 수 없지만 그들의 생각은 세속적이며 영적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어떤 품격이 결여되어 있어 참으로 영적인 사람에게 항상 나타나는 독특한 분위기가 없는 것이다.
적극적인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찾아내어야 할 것은 팔복의 증거가 그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무가 맺는 시금석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팔복을 예시해야 한다. 가시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며, 죄 때문에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화평을 낳는 자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이런 시금석은 뛰어난 이교도를 항상 제거하는 시금석이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와 일시적인 신자를 제거한다.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에 서술된 성령의 열매의 관점에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을 사람의 생활에서 찾아내어야 한다. 이것은 좋은 나무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성결하심을 믿고 자신의 사악성과 자기 마음의 어두움을 알고 있는 사람, 자신의 죄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을 구속해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 있게 된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인격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외부로 나타내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는 온유한 인상을 주게 되어 있다. 그는 겸손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그의 외모로 구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시금석은 겸손이다. 속에 이생의 자랑을 품고 있다면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가장할 수는 있지만 뜻하지 않은 때 본성이 드러난다. 그 사람의 설교 내용보다도 설교의 태도가 훨씬 중요할 때가 많다. 심판과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도 웃고 농담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주장과 인간의 능력과 개성을 신뢰하는 말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심한 행동으로 우리의 사람됨을 얼마나 잘 선언하고 있는가?
끝으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들이 이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심판주이시며 하나님은 절대로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이 같은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에 위험하고, 이 사악하고 궁핍한 세상에서 복된 우리의 대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이 분별력을 구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받았고 그 참여자가 되고 좋은 나무임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집중하자. 나무가 좋을진대 필연적으로 열매 역시 아름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6. 구원(2), 희생제물을 드린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0) | 2018.05.09 |
---|---|
[스크랩] 제임스 페커, `청교도 사상`, 3부 3, 속죄의 범위 4. 현재와 궁극적 구원 (강의안) (0) | 2018.05.09 |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2장 거짓 선지자들 (김영희강의안) (0) | 2018.05.09 |
[스크랩] 존 오웬,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 2장 영의 생각의 본질, 3장.... (0) | 2018.05.09 |
[스크랩] 청교도 아카데미 2018-2학기 개강 기도 (0) | 2018.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