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속죄의 범위
오웬의 저서는 제한적 속죄를 변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이 복음의 중심 주제-구주의 업적-에 대해 실제로 가르치는 바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제목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안에 있는 구속과 화목, 그 공로와 그로 인해 이루어진 만족에 대한 논문”이다. 그의 이전의 도르트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웬이 진실로 답변하기 원하는 질문은 복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적 대속을 입증된 것으로 가정하는 신학적 추정들은 매우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멸망할 자들까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주장에 대한 정확한 복음적 평가가 오웬의 책에 상세히 제시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헤와 능력과 완전성에 모독적으로 손상을 준다. 섭리 자체를 어처구니없는 신적 실책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로와 가치를 확대하기는 커녕 싸구려로 만든다.
이 견해는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대속에 돌리는 영광을 빼앗고 성경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명백하게 말하는 곳에 자기 구원이라는 반성경적 원리를 도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것으로 구속의 역사를 해석한 오웬의 저서가 출판된 이래 이에 비할 만한 해석이 행해진 바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았다.
4. 현재와 궁극적 구원
오웬의 책은 현대의 변질된 믿음과 설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우리에게 성경의 복음을 믿는 법과 성경의 복음을 전하는 법을 모두 가르쳐 줄 것이다.
첫째로,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주권의 구주 앞에 경배하고 그가 위하여 죽으신 모든 자가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 대속의 죽으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게 인도할 것이다.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는 도르트의 신학자들이 나타낸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완전 무능과 무조건 선택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궁극적 보전에 의해 방어되는 복음의 핵심- 우리가 십자가를 알게 되기 전에는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는 위 네 가지 진리에 의해 정의될 때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사랑을 보이신 특정한 무력한 죄인들의 집단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가 대신하여 죄를 감당하신 모든 자들의 부르심과 보존하심- 현재와 궁극적 구원-을 확보했다. 이것이 갈보리가 의미한 바이며 지금도 의미하는 바이다. 십자가는 과거에 구원하였고 지금도 구원한다.
카우퍼는 다음과 같이 찬송했다. “사랑하는 죽으신 어린양이시여, 당신의 보혈은 절대로 그 능력을 잃지 않나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함받은 교회가 구원을 받아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까지” 이것이 참된 복음적 믿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의 기초이며 옛 복음의 기초인 승리의 확신이며 오웬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의 말을 듣는다면 오웬은 우리가 자유롭게 성경적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오웬의 옛 복음이 현대의 이와 유사한 상대물 못지 않게 풍성하고 넉넉한 구원의 제안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오웬의 옛 복음은 충분한 믿음의 근거들(그리스도의 충분한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에 대한 설득력있는 동기들(죄인의 필요성 그리고 대속자의 초청이기도 한 창조의 명령)을 제시한다.
현대 설교들에 나오는 가련하고 한심스러운 그리스도와 애처롭고 감상적인 하나님을 옛 복음은 알지 못한다. 옛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옛 복음은 자신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과 주권적 능력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유로우신 전능을 모호하게 하는 모든 표현들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면 옛 복음의 설교자가 인간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초청함에 있어 억압적이거나 제한적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에 있어 옛 복음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주권적이며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새 복음의 해설자보다 훨씬 더 많이 자신의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일- 복음 진리의 모든 거룩한 지역 중에 가장 거룩한 곳-은 아마도(오웬이 즐겨 부르는 칭호인) ‘주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범죄한 인간들에게 자기에게로 와서 그들의 영혼의 안식을 찾으라고 부르시는 관대하신 초청일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가장 큰 영광은 지금도 이 초청을 공포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계신 것이다.
이 초청이 영광스러운 것은 이 초청을 하시는 분이 전능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오웬, “여러분에게 생명과 해방과 긍휼과 은혜와 평안과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로 오라는 초청과 소명들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겸손과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초청과 소명을 선포하고 전하시기 위해 아직 죄인들 앞에 서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부르시고 권하시고 계신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 앞에 나아가 자신을 대신하여 여러분과 관계하며 자신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초청을 전하기 위해 복음의 사역자들을 임명하셨다(고후5:19,20).”
번연(오웬은 그의 설교를 크게 칭찬했다), 휫필드 또는 스펄전과 같은 옛 복음의 훌륭한 해설자들의 인쇄된 설교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이 신조의 설교 문헌에 있어 비길 데 없는 풍성함과 열심과 강도와 박력을 가지고 구주를 제시하여 죄인들을 구주께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경박하고 부적절한 은혜 신학을 갖고 있는 복음 전도자들은 용서, 평안 또는 능력에 대한 죄인의 필요성과 ‘그리스도를 결정함’으로 그것들을 얻는 방법을 주로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레파들과 같이 불신자들에게 설교를 시작할 때 바로 칼빈주의적 사고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 자발적인 낮아지심, 오래 참으심, 무한하신 자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덕을 세우는 복음 전도 방식이다.
2) 옛 복음은 새 복음이 상실한 가치들을 보호한다. 새 복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다음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느냐 안되느냐는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이 입장은 두 가지의 불행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첫째, 그리스도의 은혜의 의미를 오해하도록 한다. 그 초청을 전능의 주권자의 인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가 아니라 무력한 희망을 나타내는 애처로운 간청으로 해석해야 하며, 그리하여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는 갑자기 인간의 마음 문 앞에서 그 문을 열 힘이 없이 비참하게 두드리고 있는 연약하고 무익한 인물로 변형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둘째, 중대한 결정들을 할 때 사실상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부정하고 그의 장중을 벗어나게 하며, 죄악이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친 바- 우리가 우리 운명과 영혼의 주인이다-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 창조주와 인간의 신앙 관계의 기초를 손상시킨다.
그러나 옛 복음은 매우 다르게 말하며 매우 다른 경향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옛 복음은 인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함에 있어 새 복음이 효과적으로 무시해 버린 바- 즉 심령의 새로워짐이 없이는 죄인들이 율법을 순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도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옛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선언함에 있어 그를 회심의 창시자이며 제1의 원인이라고 선포한다. 즉 복음이 공포될 때 성령에 의해 임하시어 인간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옛 복음은 자신이 증거하는 그리스도, 그를 신뢰하라는 성경의 요청들이 설명되고 적용될 때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수동적으로 인간의 결정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능동적이신 분이시며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선포된다. 새 복음의 전도는 종종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로 묘사된다. 즉 마치 인간들만이 활동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가만히 서계시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오웬이 우리에게 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옛 복음이다. 즉 믿음과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이 복음은 오웬의 원칙들에 근거해서만 전파될 수 있는 복음이다. 그리고 이 달콤한 맛을 본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복음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6:16). 오웬이 우리를 금하는 것처럼 우리가 유행하는 현대의 대용 복음에 동조하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것은 우리에게나 교회에나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성경도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4장 거짓 평안 (김영희강의안) (0) | 2018.05.16 |
---|---|
[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6. 구원(2), 희생제물을 드린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0) | 2018.05.09 |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3장 나무와 열매 (김영희강의안) (0) | 2018.05.09 |
[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2장 거짓 선지자들 (김영희강의안) (0) | 2018.05.09 |
[스크랩] 존 오웬,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 2장 영의 생각의 본질, 3장.... (0) | 2018.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