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장 무의식적 위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 중요한 것은 이 본문에서 정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이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를 가진 사람들에 관해 말씀한 진술이 아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최종적으로 버림받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시면서 이러한 경고를 되풀이하시며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즉 자기기만은 ‘많은 사람’에게 위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야말로 자기기만의 실례가 된다. 이 7장 전체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 생애를 앞으로 다가올 날에 비추어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다. 신약성경을 다 읽어보고 ‘그날’ 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자주 기록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라.
이런 사람들은 심판날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날까지 안전한 양, 자신의 구원에 관해 모두 확실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적이 었다. 바른 것을 말했다. 열렬하고 열심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행위를 많이 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행복했고 확신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안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찾아낼 만한 것이 있음을 잠시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자기들은 그리스도인이요, 구원 받은 백성이요, 영광과 영원한 축복의 상속인 이외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도그들의 마음을 스쳐간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버림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다. 나는 너희들과 어떤 관계도 가져 본 일이 없다. 너희는 항상 주여 주여 라고 말하며 내 이름으로 여러 가지를 행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너희를 인정한 일이 없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물러가라” 심판날은 경이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너무나도 육적일 때가 많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올 때 하는 말은 메시지에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용모나 그들이 ‘개성’ 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의 판단은 이렇게 육적인 것이다. 의식적 위선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매우 분별하기 어려운 것은 무의식적 위선이다. 무의식 위선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며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한다. 주님이 여기서 취급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한번 다짐할 것은 우리가 신약성경을 참된 것으로 믿을진대 이와 같은 성구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 위선에 대해서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 없는 것인가? 오히려 많은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기만의 원인을 생각해 보는 일이다. 자기기만의 목록을 만들어 그 원인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검토한다면 그 원인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영을 시험해보고 모든 것을 검토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위대한 경고의 책이다.
-자기기만의 일반적인 원인은
첫째, 구원의 확신에 대한 잘못된 교리이다. 이것은 자신이 만든 어떤 진술에 확신의 기초를 두려는 경향이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영생을 얻으리라”(요3:16,1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들은 이런 성구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정한 조항들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한,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것을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반드시 그 사람의 구원의 보증이나 확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귀들도 주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며 주님을 인정하였다.(막1:24)
‘신앙주의’ 뜻은 자기의 최종적인 신뢰를 예수 그리스도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신앙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자기 신념이나 자기가 그 신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신뢰를 둔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실한 기초를 자기가 교인이라든지 ,일정한 국가에 속해 있다든지, 유아세례를 받았다든지, 하는 사실에 두려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누구든지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는 확증이 없이 우리 신앙의 기초를 다만 어떤 규정된 교리조항을 반복하는데 두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 무서운 자기기만의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믿는다고 말만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피상적인 확신교리나 거짓된 확신교리는 자기기만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의 하나이다.
둘째, 자기 검토의 거부이다. 매우 이상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 특히 복음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거의 죄라고까지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의 논법인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조금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자신을 검토해 보라고 권면한다.(고후13:5-6)
도덕 폐기론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어떤 행위를 하든 상관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가 어떤 생활을 해도 상관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도덕 폐기론은 행동에 집중하는 순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덕 폐기론자들은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서 이것을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하나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위반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는 계명과 성경의 가르침과 산상 설교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살피고 자기를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행하는 행위, 곧 예언을 하든, 귀신을 쫒아내든, 많은 기사를 행하든, 자신의 동기를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어째서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의 이면의 진짜 충동은 무엇일까?’라고 물어야 한다. 정통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교리도 바르고,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도 열심은 있으나, 그것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만족을 위하여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살피는 일은 고통스러우며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행해져야만 한다. 이것만이 오직 안전한 방법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미혹과 자기기만의 무서운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것은 자기 활동을 보람으로 느끼며 사는 삶의 위험성이다. 이것이 기독교 생활의 최대 위험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하늘나라 일을 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병이나 사고로 누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 자신의 영적생활에 너무 등한히 한 끝에 자신과 자신의 활동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일로 중단하게 되었을 때 삶이 허무하고 어떠한 대책도 발견할 수 없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끔 일을 멈추고 자기를 검토하고 ‘나는 무엇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는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하던 일도 없어지고 혼자가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문제를 물어 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최대 위험의 하나는 자기 자신의 활동이나 노력만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바쁜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길의 하나인 것이다.
넷째, 이것에 대해 저것을 대립시켜 놓음으로써 우리의 삶의 균형을 잡으려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삶과 생활 태도에 정죄감을 느낀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선한 행실로 이것을 상쇄해 버리는 점이다. 사울왕은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아각왕을 살려두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변명하기를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하려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차 균형의 완벽한 실례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렇게 되기가 쉽다. 양심의 작용을 허락하지 않고 마이너스되는 것에 플러스되는 것을 놓아 균형을 잡는 것이다. 기독교 생활에서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곧 영적으로 파산할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복음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마저도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것에 있다. 성경의 시금석 대신 인간의 시금석을 사용하려고 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과 다툴 때가 많다.
여자들이 설교하고 목사 직무에 임하는 문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는 가운데 이것을 정면으로 금했다.(딤전2:11-15) 바울은 타락까지 올라가 그것이 원칙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가 세운 가설에 맞지 않을 때에는 성경은 이제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은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까지 분명히 하고 있으나 성경과 모순된 방법으로 그 결과의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성경은 ‘조심성 있게’, ‘두렵고 떨림으로 상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고’, ‘사람의 지혜의 전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오늘날은 ‘결과를 보시오’라며 성경의 명백한 명령은 젖혀지고 자기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카톨릭의 논법이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일반화되어 있다.
여러분이 만일 심판날에 큰 환멸의 비애를 맛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 성경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라. 성경과 다투지 말라. 성경을 조작하려고 하지 말라.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성경에 복종하라.
다섯째,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중요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이다.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만물이 그분에게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다. 이 ‘안다’는 말씀은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가 땅의 모든 종족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하셨다.(암3:2)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활동이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님을 알고 있는가? 주님이 우리들을 알고 계시는가?
여섯째, 하나님이 원하시며 복되신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 자신, 곧 우리들 ‘마음’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순종을 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리이다”(삼상15:15) 하나님은 제물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순종을 원하시며 우리들 자신을 원하신다.
주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은 완전히 전적으로 양도되지 않은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의 제물과 제사가 아무리 크며 주의 이름으로 하는 행동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이 세상에 오시어 갈보리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들을 의롭게 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사셨음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오로지 하나의 불가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주는 우리들의 전 생애와 모든 것에 대하여 어떠한 제한도 없이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큰 일들 뿐 아니라 작은 일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과 수단에 대해서도 주님이 지배권을 가지심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들의 하는 일이 이 모형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의지의 주장이요 불순종이요 사술하는 죄와 같이 하나님께는 가증한 것이다.(삼상15:23) 이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게 하는 하나의 태도가 되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주여 주여’ 하는 자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자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쫒아내는 자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하는 자들이다. 결국 그들은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도 이런 일들에 비추어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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