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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7장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김영희)

강대식 2018. 5. 30. 14:40

27 장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7:24-27)

 

- 앞의 구절을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엄숙한 성구임을 여러 번 말한 바 있으나 지금 고찰하는 24-27절은 더욱 엄숙하고 더욱 경외감을 품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절에서도 같은 주제의 계속이며, 그 주제의 최종의 결말이다. 이것은 주의 교훈에 순종하지 않는 위험, 즉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 위험에 대한 동일한 경고이다. 이번에도 자기기만의 위험이다. 여기서는 인상적인 방법으로 모래 위에 세운 집이 크게 무너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특정 장면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련의 장면 중 제 3의 장면으로 보는 방법이다.

첫째 장면은 거짓 선지자에 관한 15-20에서 외견 때문에 속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고 마음으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장면은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장면은 신념의 관점에서 혹은 우리의 열심과 열정과 우리의 활동의 관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기 위한 장면이다.

 

- 셋째 장면이자 최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 주님의 주요 관심사는, 구원의 이익과 축복만을 찾아 구하고 원하며 그것들을 표면상으로 가지는 것으로 안심하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교인에게,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하며 구원에서 오는 이익과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것이 거짓 신앙고백과 진정한 신앙고백의 차이와 그리스도인과 외견상의 그리스도인이 차이,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과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장면에는 두 사람과 두 집, 이중의 대조가 있다.

 

1) 두 사람의 차이점

첫째 유사점, 그들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집을,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집을 세우려고 했다. 두 집은 서로 매우 가까이에 있어서 정확히 같은 상태 아래에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종류의 집을 좋아했고 설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다른 점은 없었다. 두 집은 땅 밑에 있는 단 하나의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분명히 같았다. 두 사람의 생각은 똑 같았다. 더 나아가 두 집은 모두 같은 시험을 받았다.

 

둘째 다른 점, 먼저 일반적으로 그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관념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요점이다. 만일 이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상 설교의 주의 가르침의 전 목적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완전히 분명하다. 두 집, 두 사람의 차이는 시험이 와서 홍수가 밀어닥치고 바람이 불 때에만 알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 해석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때에는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주의 목적은 우리들이 이 둘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이 주실 수 있는 안약을 눈에 바르고(3:18),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으면(요일2:20), 두 사람과 두 집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6:48-49절에 현명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자기 집의 기초를 닦았고,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파지도 않았고 기초를 닦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다.

어리석다’ - 이 말은 어떤 특정적 전망, 어떤 인간에 대한 특정한 유형을 말해 주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성미가 급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라고 말씀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당황하거나 동요하거나 성미가 급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과 계획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언제나 지름길이나 조급한 결과에 관심을 둔다.

그는 동시에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집 구조나 건축을 규제하는 법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건축가가 설계도를 작성하고 견적서를 만들듯이 일하는 데 바른 방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일상생활 중에서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적인 심성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성미가 너무 급해서 지시사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불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자기의 생각만이 최고인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충동과 생각만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의견에 만족하고 언제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서두르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심성이다. 기초 없이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은 잠시 일을 멈추고 생각하거나 자문해보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그 특정한 장소에 아주 쾌적한 집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여러 조언을 모두 물리치고, 이런 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집을 세운 것이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교회사에서 교훈을 배우는 데 무관심하다. 그는 성경이 말한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하면 자신의 방법으로 그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설계도를 참고하지 않는다. 그는 장래를 예상하거나 건축 중에 있는 그 집에 머지 않아 불가피하게 엄습해 올 어떤 시험이 있을 것을 직시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물론 이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그는 한 가지 큰 소망은 영구성이 있는 집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상의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나는 지도와 가르침을 원한다현명한 사람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알고자 노력한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이나 열심에 떠밀려감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지식, 진리, 이해를 구한다. 그는 성급하게 뛰어들지도 않으며, 행동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한다.

 

2) 두 집의 차이점

첫째, 검토할 시기가 이미 자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집을 세우고 끝났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검토의 시기는 맨 처음 착수할 때이다.

둘째, 두 집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차이는 사활적으로 중대한 차이다. 그 이유는 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인 까닭이다. 기초가 나쁘면 다른 모든 것이 나쁠 것은 필연적이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셋째,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후일 시험의 시기가 왔을 때 분명하게 된다. 시험은 조만간 확실히 다가온다. 우리들은 이 시험에 직면해야 한다. 이것들에 대한 시험은 변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리 주님이 이 두 사람과 두 집의 차이점을 이처럼 사실적이며 극적으로 묘사하신 까닭은 이 차이점이 영적 영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수단이 된다. 청교도 시대나 복음적 신앙 각성시대와 같은 위대한 시대에는 이 문제에 크게 주의를 기울인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이 분별력을 구사해야 하는가?

첫째, 양자간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함께 교인된 것을 보게 된다. 두 종류의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은 외견상으로는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죄에서 용서함을 구하고, 자기의 죄가 용서된 것을 믿고 싶어한다. 평안을 원한다는 것이다. 내적인 평안을 구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늘의 세계는 평안에 굶주려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교로 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로나 위안을 구하는데 있어서도 같다. 이 세상은 위로를 구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마취제를 먹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문제나 난국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는 소원에도 적용된다. 인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다.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고, 불행하게 된 비신자들도 누군가가 이끌어 주겠다는 말과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교훈에 탐내는 듯 뛰어들게 되는 것이며. 거짓 신앙고백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만큼 이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좋은 삶을 살아보고 싶어할지 모른다. 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철학 서적을 읽고 각종 윤리체계를 연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선하며 도덕적인 생활을 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시금석들만으로 이 두 사람을 구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둘째, 더 나아가 거짓 신앙고백자도 영적 힘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과 같이 오늘날도 영적인 능력을 탐내고 구하는 일이 있다. 강단에서 영적인 능력으로 설교하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고 육적으로 행한다. 진리보다 맹목적으로 영력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셋째, 거짓 신앙고백자도 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고 있다. 그도 천국과 지옥을 믿으며 멸망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적 관심의 영역 안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 거짓 신앙고백자는 자기가 안전한 줄로 믿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안하며, 종교에서 오는 위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거짓된 내적 평안을 가질 가능성은 없는가? 만일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사탄도 놀랄만한 안도감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거의 모두 위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세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참된 것과 거짓된 것과의 유사점은 이런 것까지도 포함할 수 있고 이런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분석하는 시금석이 어떤 것인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급한 심성, 설계도에 무관심한 이 심성, 집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안다고 생각하여 치달려가는 이 심성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한다. 다만 집을 세우는 데만 열중하는 이 심성을 이 기준에 비추어서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부류에 속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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