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 어둠과 빛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 우리는 왜 그의 은혜를 더 알아 가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상태는 복음에 오명을 씌우는 것이며, 기독신앙을 아주 형편없이 대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두 가지 이유는 첫째, 이 모든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왕자처럼 살지 못하고 거지처럼 사는 비극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습을 실제로 보여줄 때 비로소 세상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은혜를 더 알아 가지 못하는 것의 핵심 문제는 요한복음 3:16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그 사랑만 알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에서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에서 가르치는 원리는
첫째, 이미 찾아온 빛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다른 빛을 고대하며 추구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는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오해하는 데 전적인 잘못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빛이 임하길 희망하고 고대하며 추구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빛은 거부한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내내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함을 거의 알지 못한다. 죄가 얼마나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지 마치 사라의 종 하갈과 같다. 샘이 내내 거기 있었는데도 하갈은 보지 못했다. 우리도 그와 같다.
우리가 어떻게 빛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기만하는지 살펴보면, 많은 이들이 니고데모처럼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더 나은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갈망하며 탐색에 나서지만 찾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한 곳에만, 한 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충만함에 대한 이 말씀 앞에 선 신자의 상황도 똑같다. 불신자를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잡아끄는 그것이 우리도 잡아끌어 그의 충만한 데서 받지 못하게 하며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인 경로에서 충만함을 찾고 구한다. 하나님의 사랑도 철학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지적인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자기가 열망하는 충만함에 이르리라 생각한다. 마귀는 무엇이든 극단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위험이다.
또 다른 오류는 극적인 체험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원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거듭남은 체험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그의 충만함이라는 문제 앞에서도 단순히 어떤 체험을 기다리고 추구하며 집회를 찾아다니거나 안수를 받거나 비슷한 시도를 할 위험이 있다.
또 의지에 관점에서만 충만함의 문제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신비한 경로나 그 비슷한 경로를 따라 크고 강한 의지력을 끌어내어 스스로 다잡는 것이야말로 충만함의 전적인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 사회에서 격리되어 수도사나 은둔자로 살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을 매질하고 생살을 찢는 등 온갖 시도를 하며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고자 노력했다.
둘째, 빛이 이미 왔다는 점에서 그 모든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씨름하고 있는가? 빛은 이미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있다.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에게서 받으면 되고, 그의 충만하신 데서 취하면 된다. 그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분이다.(골3: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져 있고 비축되어 있다. 지적이나 철학이나 지적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일까?
소망이 있다. 빛이 왔기 때문에 그 빛을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구원받을 때와 똑같다. 충만함의 측면에서도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 진리가 다 들어 있다. 오래 전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운 현대의 지식을 비롯한 온갖 것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보라.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충만해졌다.
- 우리는 왜 이런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인가? 본문이 그 이유를 정확히 알려준다. 충만함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사람의 문제는 지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데 있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의 핵심 본질을 깨닫는데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지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인류 전체의 유일한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악한 마음’이다. 죄의 형태는 중요치 않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며,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가르침에 분노한 이유는 자신들이 죄임임을 깨닫고 느끼게 하셨기 때문이며, 주님을 미워하고 죽인 것이다. 문제는 지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사랑하는 데 있다. 우리의 실제 문제는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자체에 있다. 그 욕망은 어둠을 사랑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한’다는 뜻은, 빛으로 돌이키지 않을 만큼 어둠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모든 도덕 체계는 피상적이다. 오로지 행동과 행위에만 관심을 갖고, 문제의 근원 –탐심- 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바울도 성령이 빛을 비추어 주시기 전까지는 이것을 몰랐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실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라고 하셨다. 많은 이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을 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점잖게 죄짓는 자이다.
우리가 첫째로 깨달아야 할 사실은 이처럼 악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회할 짓을 계속 반복한다.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은 자기 죄의 실상을 깨달았다. 다윗의 가슴을 찢어 놓는 문제는, 단지 간음과 살인에 있지 않고, 자기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51:10)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가진 문제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그의 충만함을 원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그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충만함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데 있다.
둘째로 깨달아야 할 사실은 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 방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빛은 항상 악을 드러낸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으로 오지 않고 자기를 방어한다. 빛으로 오지 않으면서 정말 빛을 원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설득한다. 우리는 다 이런 일에 전문가요 사기꾼이요 위선자들이다. 진정한 문제는 진정으로 빛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데 있다. 우리 모두 이 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어떻게 자기를 방어하는가? ① 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매번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때는 금세 알아차리고 비난한다. ② 과거에 결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항상 그것을 의지한다. 양심의 고소를 받고 혼란에 빠질 때마다 “그래도 괜찮아 난 거듭났으니까”라고 방어한다. 그러나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결단은 가치가 없다. ③ 마음이 불편한 일을 피하는 것이다. 의분만 느낄 뿐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④ 성경공부를 잘못하여 성경까지 방어막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만 찾아 읽는다. 또는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만 생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한다.
⑤ 악행을 선행으로 상쇄하는 것이다.
정말 빛을 원하는가? ① 정직한 의도를 갖는 것이다. 정말 원하는지 아닌지 의도부터 깨끗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선해야 한다. 그러면 행동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② 숨김없이 정직해져야 할 부분이 있다. 진심으로 즉시 충만해지기를 바라야 한다.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하기에 변화가 없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삶 전체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빛이 구석구석 전부 조사해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요한이 강력하게 촉구한 한 가지 바로 헤로디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버려도 한 가지를 남기면 소용이 없다. 전부 온전히 포기해야 한다. 빛은 이미 왔다. 그 안에 모든 충만이 있다. 빛에 굴복해야 한다.
-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집착하는 것을 보라 그것들은 어둠이다. 자신을 점검해 보라. 그리고 반대로 어떤 영광을 놓치고 있는지도 보라. 네게 주어진 가능성을 보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지라. 저 앞에 기다리고 있는 천국의 영광을 보라.
어리석은 자여! 인생은 짧고 덧없이 날아가며 스쳐 간다. 심판대에 서야 한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빛을 피해 다녔어도 그날 아침에는 빛 가운데 설 것이며, 세상에 사는 동안 행한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자신만의 어려움의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라. 지금 여기 살아있는 동안 빛 안에 거하여 우리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로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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