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스크랩] 존 프레스톤(1587-1628)의 언약 사상/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강대식 2018. 9. 17. 21:30

존 프레스톤(1587-1628)의 언약 사상

 

퍼킨스와 십스 등의 청교도 전통을 따르며 존 프레스톤도 역시 언약관계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청교도들에게 이것은 변함없는 입장이다. 언약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고, 이 언약의 출발이 가능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영광에 넘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언약에 들어가시고, 계약을 체결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빚진 자로 만드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비인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과 의지는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관계에 올 수가 없다. 언약을 베푸신 하나님은 또한 인간의 의지에 역사하셔야 자연인은 드디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께서 오셔서 인간을 움직이시고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야만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은혜언약의 조건인 믿음을 인간이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인간의 원래 모습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올 자가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마음과 의지를 움직이셔서 은혜언약의 조건인 믿음을 인간에게 주셔야만 인간은 하나님과 은혜언약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이 마음을 조명하시고 의지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과 의지의 행위라고 본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불러모으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이끌지 않으시면 그에게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궁극성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언약은 인간이 참여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결정적 역할을 먼저 필수 조건으로 갖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은혜언약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를 믿어서 그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고 구원받은 우리는 그에게 속하는 것이다. 프레스톤은 언약관계를 이해할 때, 인간보다는 성부와 성자의 우선성과 충족성을 강조했다. 이 언약이 인간에게 가능할 수 있도록 일을 이루어놓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에게는 추호도 공로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은 칼빈주의 개혁신학에 분명히 서 있다.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성을 확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해도, 구원을 위한 공로는 실질적으로 구속사역을 치루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언약신학도 이 기본 구원론의 핵심적 사상을 침범할 수는 없는 것이댜.

 

이렇게 분명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틀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언약신학은 은혜언약 안에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프레스톤은 이 언약의 체결을 위하여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역설한다. , 언약의 쌍무적 성격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이것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신실하고 완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는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대단하게 여기실 것이요,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모든 약속들을 지키실 것이다. 언약은 쌍방의 관계이기에 언약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 쪽에서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프레스톤은 언약의 조건인 믿음이 성화와 거룩한 삶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언언약의 조건을 만족하는 그 진가가 있다고 지적한다. 믿음이라는 것을 단순한 믿는 행위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인 믿음은 사실상 믿음이 가져다주는 성화와 거룩한 삶 때문에 그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이 믿기만 하였는데 그가 의롭다고 일컬어졌는가?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식을 바치는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프레스톤은 말한다.

 

비록 믿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믿음은 그것과 함께 성화와 거룩한 삶을 가져온다. 참으로 믿으면 그 믿음의 결과는 따르게 되어 있다. 참으로 믿는 자가 무지의 욕정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 자신을 보아라. 그는 믿었고 그 믿음이 그에게 의롭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성화와 거룩한 삶의 의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은혜언약에서도 거룩한 삶을 사는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스톤은 은혜언약에 들어온 이후에도 인간의 역할과 책임은 계속됨을 강조한다. 은혜언약이 지속되자면 인간은 언약을 지켜야 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산다. 이것이 영적인 삶이고 은혜의 삶이다.” 이 삶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 유지된다. 그리고 언약에 들어가기 위하여 조건적으로 필요했던 믿음과 언약에 들어간 후에 언약을 계속하여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거룩한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라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것이다. 믿음은 많은 의미와 무게를 가지고 있다.

 

믿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선행이- 공로적 의미는 아니지만- 필수적인 결과로 동반됨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역설한다. ,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던 믿음은 다름이 아닌 그로 하여금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성격과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자신의 평안과 이익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그의 믿음이다. 프레스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의 약속을 믿었고, 자신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믿었기에 자기 아들을 바치는 행동이 나올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프레스톤은 나아가서 언약이 성도들의 신앙에 기초가 되고 위로가 됨을 역설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는 이 언약에 입각하여 구원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언약의 기초 위에 신앙을 점검하고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적 방법은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믿음과 성화의 불가분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스톤은 은혜언약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더 중요한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통하는 온전한 영적 차원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는 받았기 때문에 그 영이 우리의 영에게 증거해 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속의 씨의 영인 아들의 영을 받았는지 잘 살펴보아라. ,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어졌는지 보란 말이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동화시키실 것이고 여러분의 안에 그 형상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는 여러분을 어느 정도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또한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이고 당신은 언약의 참여자라는 것을 증거하실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약에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고 성령께서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보증으로 인치신 것이다. 우리는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자칫 프레스톤이 성화의 강조를 위하여 논리적으로 언약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적 메마름을 보충해 준다. 언약관계의 점검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고 해도,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증거해 주시는 영적 체험을 제외한 논리적 체계만으로 구원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스톤의 언약개념이 쌍무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참여와 성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그리고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감소시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언약을 통한 인간의 성화를 강조한다고 해서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알미니안주의로 넘어가는 일도 없는 것이다. 프레스톤은 은혜언약에서 인간의 조건인 성화 부분을 강조하면서도 성화를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정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스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잘 이루시도록 간구하여야 함을 역설한다.

 

은혜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프레스톤의 핵심 중점인 성화도 결국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항상 함께 동반하며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의 틀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 프레스톤은 퍼킨스와 십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pp 85-98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