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 우리의 소망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살후2:16)
“나는 소망한다”.
“나는 결국에는 잘 되어나갈 것이라고 소망한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소망한다”.
“소망한다”라는 말은 종교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사람들의 소망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소망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소망하면서 나이가 들고, 소망하면서 결국 죽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지옥에서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죄가 용서받고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우리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좋은 소망”(살후2:16)이요, “산 소망”(벧전1:3)이며, “부끄럽게 아니하는 소망”(롬5:5)인가?
“좋은 소망”의 다섯 가지 특징)
1. 좋은 소망은 그 소망을 가진 자가 설명할 수 있는 소망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5)
우리의 소망이 건전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소망에 대하여 왜, 무슨 근거로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폭 넓은 학식과 지식이, 그리고 잘 말할 줄 아는 능력이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의 소망에 관하여 알아야 하고 그 소망의 본질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소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말할 것이 없다면 나는 그가 조금도 참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는 엄청난 위험 속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를 믿고 있는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2. 좋은 소망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소망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시119:49)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롬15:4)
우리의 확신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하신 근거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성경에 대한 어떤 정당한 근거가 없는 단순히 자신의 좋은 감정은 결코 좋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에 대해 말해 주는 좋은 말은 결코 좋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가 죽어가는 순간에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친구들은 불행한 위안자들이다. 아무리 좋은 의미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는 분명한 적이다. “부끄럽게 아니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목사들이 그들에게 강력하게 성경을 읽으라고 주장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당신이 읽거나 듣지 못하면 틀림없이 무지 속에서 살다가 무지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소망은 잘못된 소망이며 많은 사람은 막대한 손해를 치르고 이것이 잘못된 소망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광스럽고 완전한 책인 성경은 사람들이 아무리 경시하더라도 인간의 영혼에 화평을 얻게 해주는 유일한 샘물이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성경으로부터 생명수를 찾게 될 것이다.
3. 좋은 소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한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1:1),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좋은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의 중재와 구속하는 역사 위에서 모든 죄 사함과 구원의 기대를 발견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그 안에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것을 받으며 그의 모든 죄를 예수께 벗어던지고 예수 안에서 안식한다. 예수님만이 그의 영혼의 확신에 대한 유일한 기반이다.
그리스도께 기초하지 않은 다른 모든 소망은 모래 위에 지어 놓은 소망이다.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은 소망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 성찬을 받는 것이 결코 소망의 기반이 될 수 없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씻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러나 그들은 생명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으나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지 못한다. 그들은 기독교의 외적인 면만 지녔을 뿐이며 연약한 갈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반석이요, 믿을 만한 주춧돌이다. 그는 우리가 넘겨준 짐을 모두 지탱하실 수 있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모두의 확신의 근거가 되어 왔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부끄럽게 아니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이 어떤 임종의 자리에 참석하여 듣고 싶어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좋은 소망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소망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좋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좋은 소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느낀다. 그는 이제 다가올 좋은 것들에 대하여 잘 준비된 기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인식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망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는 크고 작든지 이러한 의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은 광신과 지나친 열광에 의하여 엄청난 불명예를 지니게 되었다. 단순한 동물적인 흥분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로 오인되어 왔으며, 모든 종교적인 감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비난이 쏟아졌고 이러한 종교적 감정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남용과 왜곡이 우리에게서 그 진리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그 진리를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종교적 감정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화평’과 ‘안식’, ‘기쁨’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보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건전한 것이며 결코 사치스럽거나 광신적이고 열광적이지 않은 내적인 체험이다. 나는 거리낌 없이 이러한 감정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며 누구도 이러한 감정에 대하여 부끄럽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속에 이러한 감정에 대하여 희미하나마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은 “좋은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믿기보다는 차라리 나사로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바디메오가 시력을 회복한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고 믿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목마른 여행자가 물을 마시고 그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헐벗고 배고픈 방랑자가 따뜻하게 옷을 입고 배부르게 먹고 집에 있을 때에 그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탄생과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피로써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성령의 거하심 등은 결코 사람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느껴지지 않는 소망과 내적인 체험이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내적인 감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세운 교회의 성도가 화평과 기쁨과 확신이 없는데도 그들을 참된 성도로 인정하였다고 하는 상황을 그려볼 수 있겠는가?
그리스 석상의 차가운 대리석이 결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집트의 미이라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물관의 박제된 짐승이 움직이지 못하고 차갑게 굳어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생명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어떤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좋은 소망”은 느껴질 수 있는 소망이다.
5. 좋은 소망은 생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소망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신이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 한다. 그들은 성경의 교리의 요점에 대해서 논쟁하고 토론할 수도 있고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순서대로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들은 논쟁하기 좋아하는 완벽한 베냐민 족속이다. 그들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없는 자들”(삿20:16)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열매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화함과 겸손이 조금도 없는 자들이다. 사랑이 없는 소망은 결코 소망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과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으로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화되지 않은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사탄의 선택이다.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소망은 결코 소망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심지어 그 설교자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울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벗하고 산다. 주일에 그들의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지만 주일 외에 그들의 손은 에서의 손이다. 그러한 소망은 질이 나쁜 금속이며 가짜 동전과도 같다. 그것은 성령의 인침이 없으며 천국에서 결코 화폐로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 건전한 소망의 다섯 가지 특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소망이야말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요, 모든 사람의 소망이며, 모든 교회와 종파와 민족과 자기 나라 말을 가진 사람들의 소망이라는 것을 믿는다.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소망이다. 그와 같은 소망이 어떤 사람이든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임을 믿는다. 이러한 소망이야말로 “은혜로 주신 좋은 소망”이다.
적용)
1)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당신의 영혼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는가?” 당신이 교회를 가는가 혹은 복음을 인정하고 기도드리는 것이 바르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 하나님께 자기 일을 설명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에 당신의 바람막이를 세우고자 하는가? 시간은 짧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영원은 가까이 오고 있다. 다른 세계가 곧 시작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무엇을 소망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게 된다면 “나는 나의 영혼에 대해 무엇을 소망하는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으며, 그에 대한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 나는 영국에 기독교의 기초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며 그들은 세례 받은 이교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아무런 자격도, 정당한 권리도,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의 기반도 없이 죽는 날에 천국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당신이야말로 진짜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나는 나의 영혼에 대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소망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조용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당신의 확신의 본질에 대하여 신중하게 조사해 보고 그 소망이 잘 만들어져 있는지 확신하기를 간청한다. 그 소망은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는 소망인가? 그 소망은 당신의 생명을 거룩하게 하는가?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그렇게 많은 “잘못된 소망”이 참된 소망으로 행세하고 있는 때가 결코 없었다는 것을 확신한다. 논쟁하기 좋아하는 신학이 풍부하게 번영하며 실제적인 신성함은 결핍되어 있을 뿐이다. 살고자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 그의 마음을 바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제 심판 날에는 더욱더 무시무시한 폭로가 있게 될 것이다.
2) 한 가지 요구를 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 “선한 소망”이 발견될 때까지 찾으라는 것이다. 좋은 소망은 성경에서 “은혜로 주신 좋은 소망”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소망과 더불어 인류에게 베풀어진 값없는 은혜는 값없는 초대를 무한히 베푼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친 자를 위한 안식이 있고, 두려워하는 자를 위한 피난처가 있으며, 더러운 자를 깨끗하게 하는 샘물이 있고, 병든 자를 위한 치료약이 있으며, 마음에 병든 자를 위한 위로가 있고, 잃어버린 자를 위한 소망이 있다. “소망”을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로 가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들어갔던 문은 아직도 열려 있으며, 삭개오와 마태가 죄를 씻었던 샘물은 아직도 개방되어 있다. 조금도 미루지 말고 정직하게 소망을 구하라.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고 정직하게 구하지 아니하므로 파멸하게 된다. 당신은 자신을 위하여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께 고백하라. 변명할 말도 없으며 변명할 수도 없고 자신을 변호할 힘도 없다고 고백하라.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다음 기회로 미루지도 말라. 당신을 여전히 머뭇거리게 만드는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던져 버리라. 그리고 당신 앞에 놓인 그 소망을 붙잡으라.
3) 한 가지 조언을 하고자한다. 당신이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열렬하게 그 소망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라. 그리스도의 소망은 아주 민감한 식물과 같다. 소망이라는 식물은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며 위로부터 온 희귀한 것이다. 이 소망이라는 식물은 이 세상의 찬 서리에 의해 순식간에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 물을 주고 세심하게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이 식물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당신이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망을 항상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 힘든 시련이 무장한 병사와도 같이 갑자기 우리를 침입할 것이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치명적인 병과 상처가 우리의 병상 위에 낮게 드리워질 것이다. 자신의 등불을 계속 반짝이는 상태를 유지하고 매일 그리스도와 친교를 지속하는 삶을 누리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이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망이 해마다 더욱 강하게 커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 사도 바울이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딤후1:12)라고 한 것처럼 “내가 누구를 믿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또한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소망이 어떠한 것인가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천로역정』에서 나이든 크리스천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가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하는 무시무시한 마지막 시련을 겪어야 했다. 소망을 가진 자는 잘할 수 있으나 보증을 얻는 자는 더 잘할 수 있다.
당신이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감사하라. 누가 당신을 달라지게 하였는가? 당신은 어찌하여 자신의 죄를 느끼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 줄 알게 되었는가?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어찌하여 당신은 예수께 의존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이 세상에만 관심을 쏟지 않고 어찌하여 당신은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고 거룩하게 되려고 애쓰게 되었는가?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 있을 뿐, 곧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이다.
여행이 끝나게 되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서”(롬5:2) 나아가라.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 소망의 투구를 쓰고 나아가라. 용서와 인내의 소망, 심판 날에 죄를 면제받을 것에 대한 소망과, 마지막 영광의 소망을 투구로 쓰도록 하라.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라. 믿음의 방패를 들라. 진리로 허리띠를 매도록 하라. 용감하게 성령의 검을 휘두르라.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쓸 것을”(살전5:8)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한다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비웃고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혼의 닻같이 튼튼하고 견고하다”(히6:19). 파도가 높아져서 그를 위 아래로 흔들리게 할 수도 있으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조난당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많은 눈물과 고통과 고난과 근심과 실망과 분노를 겪고 나면, 우리는 본향에 있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망하던 모든 것을 찾게 될 것이며 우리가 소망하던 것보다 수백만 배 더 좋은 소망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그곳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만나고 “항상 주와 함께 있게”(살전4:17)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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