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2부 2장 영적 후패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

강대식 2019. 2. 15. 08:15

2장 영적 후패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

 

1. 성도의 영적 후패와 하나님의 자비(성도를 향한 은혜와 특권)

 

강물은 어디서 어떤 경로로 흘러왔든지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물의 양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물살이 거세지기 마련이다. 그러하듯이 은혜도 영광의 대양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풍부해지고 도도해진다. 그렇게 자라지 않는 은혜는 구원받을 만한 은혜가 아니다.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질고와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기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곤고와 환난 중에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만일 겉사람이 후패되더라도 영혼이 몸을 떠날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질 때 내적인 부흥과 갱신이 있다면,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경험이 있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속에서 나오는 은혜의 풍성함을 통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92:12-15). 모든 의인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스스로 죄악된 나태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풍성함을 결코 맛볼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광야에 널려 있는 잡목이나 덤불과 같을 뿐이다. 의인들은 주의 집에 심긴 나무와 같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심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 생활의 모든 방편의 중심 장소이다. 은혜 안에서 자라고 풍성해지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기쁘게 허락하신 방편이다. 주의 집에 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규례들을 통하여 전달된 은혜 안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고 서 있도록 세워졌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주의 집에 심기지 못하면, 우리는 주의 뜰 안에서 번성할 수 없다(1:3 참고). 만일 우리가 그런 규례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는 데까지 이르는 번영과 그 이상의 번영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도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3:17 참고), 그리고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기를’(2:7 참고) 기도하며 바랐다.

 

여기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은혜와 특권이다.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것, 곧 영적인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들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의 진액이 풍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영적인 생명과 은혜의 원리이다. 이것이 그들 안에 풍성하게 넘쳐 은혜를 행사하도록 힘과 활력을 줄 정도가 되어 후패함과 방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들은 진액이 풍족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강건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빛이 청청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에 생명력이 넘친다는 말이다. 활력이 있는 은혜가 풍성한 신앙고백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순종의 모든 의무들에 대해 그들이 여전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종려나무나 백향목 같은 나무도 늙으면 그 진액이 마르기 쉽고 푸르름이 덜해지기 쉽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노인이 강건하고 활력 있어 보이는 경우를 찾기는 드물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특권을 약속하고 있다. 내적으로 은혜의 능력에 활력이 넘치고, 모든 순종의 의무를 행하는 면에서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여기서 탐구하고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롭고도 선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라. 우리에게 우리가 싸워야 할 노인의 모든 후패와 모든 시험을 대적하여 맞설 용기를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라!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14:9). 영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이 신자들을 지켜 번성하고 열매를 맺도록 끝까지 주장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이제 이 확실한 증거의 기초를 놓았으니, 우리가 이 은혜에 동참하는 방식은 바로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바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단하게 바라보는 것임을 확증하고자 한다.

 

2. 영적 생명의 성장과 후패, 하나님의 회복

 

한 해가 다 가고 있는데도 샘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땅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땅이 정말 버려진 불모지라는 것을 알려 주는 분명한 표증이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후패함으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러한 가뭄을 겪는다면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평강이나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젊은 날이나 자기 생애의 이른 시기에 신앙적으로 매우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신앙이 죽어 냉랭하게 되고 세상적이고도 이기적으로 변했다면, 그리고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의 신선한 샘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진정한 열매를 맺은 적이 전혀 없는 건조한 마음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고를 통해서 자극을 받아 자신의 상태와 조건을 부지런히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음의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영적 생명은 끝까지 자라고 증가하기에 합당하다

이런 영적 생명은 잠시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 구별된다. 영원히 계속되지 못하는 믿음도 한동안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과 체질 속에는 계속 존재하면서 자라고 증가하는 것이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믿음을 이렇게 묘사하신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3:20-21).

 

그런 믿음은 큰 시험이 오면 사그라져 결국 알지 못하는 사이에 쓰러지고 만다. 그리하여 아무런 열매도 없는 상태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후패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시험해 보고 검증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신앙고백과 순종의 원리가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적 생명은 가장 확실하게 자라고 진전되는 일들에 비유된다. 또한 그런 믿음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발전을 보이는 것들에도 비유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4:18). 의인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지키는 길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119:35). 의인의 길은 그 원리와 신앙고백과 열매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지혜자는 그것이 돋는 햇빛과 같다고 말한다. 아침에 돋는 해는 점점 떠올라 눈부시게 비추다가 결국 가장 밝은 정오에 이르게 된다. 때로는 구름이나 폭풍으로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의인의 길도 마치 그와 같다. 의인의 길은 계속 진행하여 증가하다가 결국 최절정에 이르게 되어 영광의 완전한 날에 다다르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여러 가지 방해를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그렇게 된다. 의인과 외식자의 빛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의인과 외식자 모두가 동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인의 경우에는 어떤 때에는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점점 더 자라고 꾸준히 진행하여 나간다. 반면 외식자의 경우는 그 은혜의 세력이 후패해지고 희미해져서 결국 어두워지고 뒤틀린 걸음을 걷게 된다.

 

구원하는 은혜의 원리가 있는 곳마다 그 은혜는 분발하여 끝까지 자라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여러 가지 방해를 받아 잠깐 후패한다 하더라도 그 원리를 소유한 영혼은 변화되지 않고서는 안정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결국 회복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의인의 빛은 시험을 받더라도 결국 항상 증가한다. 영적 생명의 원리가 있다면, 그로 인해 아침 햇빛과 같이 밝음을 되찾고,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물줄기를 다시 분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내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그런 은혜를 계속 공급해 주셔서 그들의 영적 생명이 자라고 증가하며 끝까지 번성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44:3-4).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하는 자신의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은혜의 복락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푸른 풀같이, 시냇가의 버들같이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이런 약속 아래 있는 신자들은 영적으로 그렇게 성장할 것이다. 그들의 진액이 마르지 않고 번성하여서 여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관한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하여 그 약속이 성취될 때 만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전달해 주는 첫 번째 방편인 새 언약의 약속들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둘째, 그러나 신자들 속에 있는 이 은혜의 성장과 정도와 분량에 관한 약속들은 그렇지 않다. 이 약속들이 우리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취되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많은 의무들이 있다. 보편적인 복음의 순종을 위해 부지런히 애를 써야만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4-10).

 

셋째, 이렇게 성장하고 번영하고 열매 맺으리라고 약속하는데도 우리가 받은 은혜를 바르게 활용하는 데 게으르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들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패되어 끝내 천하고도 헛된 날들을 보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원리가 노년에 이르러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계속 번창하고 자라나며 풍성해지리라는 복된 약속들을 수없이 수없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목적을 이루는 은혜는, 우리가 영적 나태함과 안일함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열렬히 기도하고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를 행사하고 모든 거룩한 의무들을 깨어 감당하는 일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생명에 양식을 공급하심으로써 이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것을 보존하셨다. 영적 생명은 그 양식을 통해서 강화되고 증가된다. 모든 생명은 양식을 통해서 보존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양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규례들도 우리의 양식이다(벧전2:2-3).

 

이 생명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든지 진행되는 중이든지 아니면 연약해져서 후패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하신 말씀을 통해서 그 생명에 합당한 영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날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양식의 섭취를 게을리 한다면, 연약하고 번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신자들이 이 양식을 섭취하는 일에 간절하지 않거나, 부지런히 그 양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거나, 그 양식에 더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거나, 말씀을 설교할 때도 부패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통의 음식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하여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들이 영적 후패에 떨어진다 해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에라도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에게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제시된 첫 번째 요점이 그것이다. 곧 영적 생명은 본질적으로 노년, 아니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번성하고 자라날 정도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2)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영적 후패에 빠져 큰 곤고함에 처하고 영원한 파멸의 위험을 당할 수 있다.

 

이런 영적 후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점진적이고 보편적인 후패로서, 그 은혜의 활력과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원리와 행사 모두에 그런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둘째, 시험의 세력으로 인해 갑자기 죄에 빠져 야기되는 영적 후패가 있다. 그런 죄에 빠지면 영혼의 영적 능력이 빠져나가 모든 견고한 평안을 빼앗기게 된다.

 

일시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경우, 이 세상에서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주어질 때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특히 그들에게 충분히 시간이 주어지고 외적인 번영도 함께 있거나,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핍박을 받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보라. 거의 대부분이 후패되어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들이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그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다(딤후3:5 참고).

 

그들은 신앙의 모든 의무들을 공개적으로 버리지는 않지만, 그 생명과 향기를 점점 더 잃어버리다가 결국 자신들의 상태를 드러내고 만다. 차지도 덮지도 않고,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일시적으로 믿음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병듦과 후패를 지각하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사로잡히고 빼앗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때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6:10)라고 울부짖기도 한다.

 

반면 진실한 신자들은 후패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자기 속에서 발견되면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많은 함정과 시험과 죄의 기만 때문에, 또는 치료받을 수 있는 바른길에 대해 무지하여 빨리 회복되지 못하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상태 속에 자신을 방치해 두지 않는다. 또 어떤 합당하지 못한 위로로 자신들을 거짓으로 안심시키지도 않는다.

 

 3) 많은 신앙고백자들이 영적 후패에서 떨어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효력을 누리지 못한다

영적 후패에 떨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든 악의 은밀한 뿌리이다. 그것은 파헤쳐 파내기 전에는 제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후패에 대해 확신하게 하는 일은, 영적 후패에서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각성시키지 않고서는 치료할 수가 없다. 자신의 병을 모르는 사람은 치료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병을 더욱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다음의 몇 가지 질문과 관찰을 이용해 보자.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영적 후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처음 하나님께로 회심한 이후에 게으름과 나태함과 시험에 전혀 떨어진 적이 없이 항상 푸르고 번성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함정에 전혀 빠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만일 여러분이 영적 후패를 경험해 본 적이 전혀 없다면, 두 가지 중 하나에 해당된다.

 

하나는, 여러분의 영혼이 영적으로 번성하는 상태 역시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연약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건강하고 힘 있는 상태를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은 사람은 생명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신앙고백자들이 영적 후패에 대한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선한 강건함이 무엇인지도 전혀 경험한 적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회복을 위한 치료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 중에는 온갖 종류의 죄를 다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침륜에 빠진 후패함에서 회복시켜 주겠다고 달려들면, 그들은 여러분을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서 아무런 악이나 위험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모든 것이 다 잘되어 있다고 단정해 버린다. 언제나 그러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쉽사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데로 인도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하면, 만일 여러분이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없다면 자신이 안일한 생각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한다. 그런 상태는 죄 가운데 죽어 있는 것과 구별하기가 매우 힘들다. 라오디게아는 눈에 띄게 후패해 있었는데, 그런데도 그 교회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상태에 얼마나 무지했던지, 자신들이 부요하고 부족함 없는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교회는 진정 은혜의 생명과 능력에 속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다. 스스로 자신들은 옳으며 어떤 책망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가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 관하여 증언하기를,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7:9)라고 하셨다. 에브라임은 힘이 쇠약해져서 죽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7:10)라고 덧붙인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후패를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설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안일함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들을 일으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후패에서 벗어나 회복하라고 사람들을 불러 촉구하는 것이 대부분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그런 잘못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촉구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해당된다는 식이다.

 

자신의 영혼 속에 영적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고 있는가?

영적 평안과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신실하게 행하는 믿음생활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산물이다. 후패해지는 영적 상태와 견고한 영적 평안이 서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평안을 가진 적이 있다면, 그 평안을 상실하고 나서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적인 후패를 외적 모습으로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은 내적이고도 감추어진 것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킨다. 모든 육체가 그 길을 부패시키는 모습이 오늘날보다 더 악하게 나타났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 갔던 옛 성도들의 방식과 태도는 어떠했는지를 보라.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2). 왜 그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분발하지 않는가?

 

외적으로는 신앙적 의무를 잘 이행하면서도 실상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옛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43:22).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어디서 하나님을 괴롭게 여겼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많은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왜 우리가 책망을 받아야 합니까?” 지금도 그렇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쓰는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요구하는 여러 의무들을 외적으로 잘 감당하는데도 하나님을 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먼저, 그런 신앙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혜를 행사하는 데 대해 사람들의 마음의 영성과 의도가 그럴 수 있다. 모든 의무를 감당하는 데 역사해야 할 은혜는 그 의무의 생명과 혼이요, 그 의무를 생기 있게 지탱시켜 주는 원리이다. 그것이 없이 외적으로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죽은 시체와 같다.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하는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이다(4:24 참고).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속에 성령께 속한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항상 이와 같은 상태로 유지하고, 모든 거룩한 의무를 행할 때에 은혜가 항상 힘 있게 역사하도록 하는 것은, 대단한 영적 부지런함과 근신이 요구되는 일이다. 깨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실이 만 가지나 일어날 것이다. 모든 나태함과 형식적인 행함과 육체의 곤비함과 생활 속에 얽힌 일들이 기도하려는 의지를 계속 좌절시키려고 애를 쓸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마음으로 자신을 부추겨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계속 촉구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라는 증거이다(64:7 참고).

 

참된 영적 소욕과 신앙적 의무에 대한 진실함과 사모함이 있는가?

열심과 겸손, 마음의 뉘우침과 영적인 생각, 그리고 영혼의 활력과 하나님을 즐거워함, 또 사랑과 자기 부인 같은 은혜들이 있는지 살펴보라. 노년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그런 일에 진액이 마르지 않고 풍성해지고 있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 속에 그런 은혜들이 있고 또한 풍성한가?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8).

 

그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정도로 우리는 은혜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 모든 은혜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두 가지 보편적인 원칙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우리 영혼의 양식을 잘 섭취하게 하는 영적 미각을 상실하는 것은 이런 모든 은혜에 대하여 후패하였다는 증거이다. 영적 미각은 간절한 소원과 훌륭한 의욕을 지니고 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이런 영적인 소욕을 위해서는, 신령하게 자라고 번성할 목적으로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영적인 소욕은 좋은 음식을 보면 자연스럽게 입맛이 당기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은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 영적 미각이 우리 속에 전처럼 동일하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언제나 전파되는 말씀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갈망과 영적 기쁨을 가지고 그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음식에 대한 미각이 많이 줄어든다. 그처럼 적지 않은 신앙고백자들이 영적 미각을 상실하였다. 자신이 다 자랐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만족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소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 능력과 효력을 맛보지 못한다. 시편 기자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10)라고 표현한 말씀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런 맛이거나 그 어떤 기쁨도 주지 못하는 맛일 뿐이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27:7). 영적 소욕을 상실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은혜가 후패했다는 증거이다.

 

둘째,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태만하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유의 은혜가 후패하였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왜냐하면 은혜가 바르게 작용한다면, 그 은혜는 다윗이 시편 119편에서 스무 번이나 선언한 바와 같이, 신앙과 그 신앙의 목적들을 위해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모든 일들과 경우들이 신앙 다음으로 미루어질 것이다. 신앙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정서를 이끌어 갈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없고, 선한 행실의 열매가 없으며, 회개하고 행실을 고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부응할 마음의 기꺼움이 전혀 없는 것, 세상을 사랑하고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그런 원리들이 마음속에서 득세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 등이 있다면, 그런 신앙고백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이 참된 은혜를 소유환 적이 없거나, 무서운 후패로 떨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4) 신자들이 이런 후패에서 벗어나 내적인 원리에서 충만해지고, 영적 생명의 외적인 열매를 맺도록 하는 방식과 방편들을 생각해 보자

 

영적 후패는 치료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가는 길에서 잘못 내디딘 모든 걸음들이 회복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에게 재앙이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회복하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영원히 침륜에 빠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그 회복을 위해서는 바른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가 수령이 오래되어 고목이 되어 갈 때, 그 나무의 주위를 파서 영양분을 주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면 나무는 다시 무성해지고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고 명령하신 방편을 사용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죄를 죽이는 엄격함에 대해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것과 연관되는 모든 의무들에 철저하게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순종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하며, 열심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그들에게 첫 번째 희망이 생길 것이다.

 

영적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침륜에 빠진 사람들을 회복시키거나 신자들을 영적 후패에서 회복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 속에서 작용하는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이다. 바로 이 은혜에서 회복의 역사가 나온다.

 

우리의 반역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방식으로 치료될 수 있도록 지정해 주신 방편은 새롭게 회개하는 것이다

새로운 회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뜨거운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회개가 나타난다. 성경은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14:2)이라고 말한다.

둘째, 침륜에 빠져 반역한 죄를 진실로 참회애야 한다.

셋째, 결연한 자세로 다른 모든 소망과 기대를 버리고 온 마음을 기울여 그를 신뢰하고 확신해야 한다.

 

영적 회복은 그 본질과 원인과 효과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그것은 본질상의 반역을 고치는 일이다.

둘째, 영적 회복의 원인들을 생각해 보자. 먼저 주도적인 원인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만 우리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셋째, 영적 회복의 효과를 보자. 그 효과는 그들이 이전에 도달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분량의 거룩과 순종, 평안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5) 영적 생명을 되찾고 열매를 맺기 위한 특별한 방안

은혜의 샘 근원이 그리스도이심을 항상 묵상하라

우리가 받는 모든 은혜는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확증하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부단히 행사하라

 

3. 성경의 증언과 효력

 

1) 성경이 그 영광을 증언하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34:5).

 

2)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속에서 이 복된 효과를 어떻게 산출해 내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본받느냐에 따라서, 우리 속에서 은혜의 생명이 얼마나 번성하고 번영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그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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