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9/8 주일설교,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 고전 9:24-27

강대식 2019. 9. 15. 13:56

2019-09-08 주일설교

본문: 고전 9:24-27

제목: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남들에게는 전파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

그래서 내 몸을 쳐 복음에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치지 말고, 세상을 치지 말고, 내 몸을 쳐야 한다.

남의 잘못과 허물은 그렇게 잘 보고 공격을 잘하면서도

그 잣대를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뺄려고 하지 말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고 밝아진 눈으로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6:42)

 

주님은 내 제자가 될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내 몸을 쳐 복음에 복종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질 수 없고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떡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할 수 없다.

오직 말씀으로 사는 사람만이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성경을 사랑하고 높이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고,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하는 길이다.

복과 형통을 원하면서도 저주의 길을 가는 것이 문제이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러니 염려와 걱정이 끝이 없고,

마음은 메마르고 외롭고 생활은 팍팍하고 평강이 없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해도

먼저 구하는 것이 내 나라와 내 의를 억척스럽게 구하고 있으니,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없어지는 것 뿐이다.

 

구약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이런 것들에 대해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기도와 믿음생활에 열심은 있는데,

말씀 안에 있는 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왕이고, 자기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암흑의 땅으로 만들고 만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자신부터 적용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내 몸을 쳐 먼저 그 복음에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아가 내 육성이 펄펄 살아 있는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악취부터 먼저 맡고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머리를 돌릴 것이다.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질그릇 안에 모시고,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음에 복종시키지 않는 한, 예수의 생명은 물론 향기를 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긴 인생 길을 광야의 길로 주시면서 우리를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것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고,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내 몸을 쳐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만이 복의 길이고 형통의 길인 것을 명심하자.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을지라도, 하나님이 집을 세워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성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다 헛것이 되고 만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다.

친히 공급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방법에 귀를 기울이자.

 

1. 상을 받기 위해 달음질하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성경은 우리 믿음 생활이 달리는 경주라고 하신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위시한 믿음의 영웅들을 가리킨다.

우리 앞에도 믿음의 경주가 당해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인내로써 잘 달릴 수 있다.

 

달리면서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분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분을 본 받아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야 영광에 이를 수 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

다 달릴지라도 일등 상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세상 떠날 시각이 되었다고 하였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도 이 면류관을 받도록 우리 각자 앞에 있는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한다.

 

적당히 흉내만 내고 게으름 부리며 달리지 않는 사람은 상을 받을 수 없다.

사람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게 달려서 상을 받는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썩지 않을 승리의 면류관이다.

 

2. 모든 일에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6)

 

이기기를 다투는 자들은 다른 모든 일에는 절제를 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올림픽 메달을 따기 위해 운동 선수들은 선수촌에 입촌하여 훈련에만 전념하고

다른 모든 것은 절제해야만 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에 자신을 분산하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다.

명장이 되는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고 기어코는 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의 정신은 신앙의 경주에서도 다를 수 없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고 동일한 부지런으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받았다. 우리도 본을 받아야 한다.

 

한 가지를 선택했으면 다른 모든 것은 절제하고 그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 충실해야 둘째 계명도 실천할 수가 있다.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떡으로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멸망에 이르고 만다.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무거운 것이요 얽메이기 쉬운 죄이다.

그것들을 벗어 던져버리기 전에는 집중해서 달려갈 수가 없다.

벗는 것이 있어야 입는 것이 있고, 비우는 것이 있어야 채우는 것이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헌 부대를 버리지 않으면 새 부대에 넣을 수 없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고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

옛 습관들을 칭칭 감고 있으면서 새 습관을 형성할 수는 없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고자 하면 구원을 얻는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고향을 버리고 달려가 가나안을 얻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즐기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

그것은 모세가 다른 무엇보다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달려가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3. 향방 없이 허공을 치지 말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6-27)

 

달음질하면서 방향이 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싸우는 사람이 상대를 치는 것이 아니라 허공만을 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썩을 승리자의 관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는 구원 받은 줄 알면서 평생을 교회 다녔는데,

그 긴 세월을 향방 없이 달렸고 허공만을 치며 싸웠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겠는가?

 

구원의 복음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지 않은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구원의 향방도 모르고 허공만 치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분명 말씀하셨다.

구원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교인들은 어느 문으로 어느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는가?

 

구약 이스라엘을 보고 본보기로 삼고 깨우침을 받으라고 하신다.

그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

 

그들이 세례를 받았기에 구원은 받았다고 가르치는 거짓 목사들의 감언에 속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

 

참된 복음에 자기 몸을 쳐 복종하지 않았다가 버림을 당하고 만다.

선 줄로 생각했다가 넘어지고 만다.

구약 이스라엘의 다수에게 일어난 일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다수에게 일어날 것이다.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인 청교도들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그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우리 주님도, 사도들도,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분명히 가르쳤다.

 

종교개혁은 다름 아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로, 성령의 가르친 전통으로 다시 돌이킨 것이다.

그러나 그후 5백년이 지난 지금 교회와 신학교는 다시 구약 이스라엘로,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가족교회와 청교도아카데미의 사명이 큰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8:11-14)

 

교회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목사도 있고 예배도 다 있지만,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은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일지라도

다 갈하여 쓰러지게 만들고,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기갈인 것이다.

영혼이 순전한 말씀을 듣지 못하면 기갈로 쓰러져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노아시대의 홍수 때처럼 웃고 즐기며 노래하며 춤추다가 일시에 다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도 그와 같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는 과연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돌아보고 오직 복음에 내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향방 없이 달려갔다면 그 달음질을 멈추어야 한다.

허공을 치며 싸웠다면 그 싸움을 멈추어야 한다.

분명한 방향과 싸움의 대상을 말씀을 통해 배우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달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