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2 주일설교
본문: 고후 10:4-5
제목: 그리스도에게 복종함
1.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는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무기로 싸운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고후6:7)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가 좌우에 가져야 할 의의 무기인 것을 명심하자.
진리의 말씀도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되기 쉽다.
성령의 능력도 말씀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릇되기 쉽다.
거듭나는 것도 성령으로 나면서 동시에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오직 주의 말씀도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에 세세토록 있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1:3),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래서 천지는 없어져도 말씀은 영원히 존재한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다.
말씀은 성령이 쓰시는 검이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을 무기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주님은 내 말이 곧 영이고 생명이라 하셨다.
우리에게도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광야길로 걷게 하시는 것은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심으로
떡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무기요 능력이요 양식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 있는 곳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
청교도들은 성경은 “진리의 보고요 성령의 서제”라 여겼다.
우리도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 있는 보물 창고요,
성령의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서제로 여겨야 할 것이다.
산으로 철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은
사탄에 사로잡히고 사탄의 능력을 받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오인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 은사만 붙들고 말씀과는 멀어지고 말씀을 왜곡한다.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은 성령의 능력도 무시한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 성경을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만든다.
성경 말씀을 줄줄 외면서도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율법화하고 겉만 지켰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
진리의 말씀도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면 겉만 지키고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그 말씀을 능력으로 살아야 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게 된다.
성령의 능력과 지혜가 함께 하지 않으면 말씀도 율법화 형식화의 우를 범하게 된다.
사두개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을 믿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가진 세상 지혜와 가치관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진리의 말씀을 세속화하였다.
지금도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이 신학교와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다.
소위 현대신학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의 온상이다.
성령의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을 무시하니까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기독교를 항상 지배하고 교회를 장악하고 멸망의 길로 인도하니 문제이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지금도 그들이 순전한 말씀을 혼잡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왼 손에, 성령의 능력을 오른 손에 의의 무기로 쥐고 싸워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죄와 육신과 세상과 사탄이다.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말씀에 사람의 지혜를 섞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계속하게 하신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더 좋아하는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순전한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났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고,
기독교 2천년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순전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없는 곳에 교회 바벨탑은 높게 솟아도 멸망으로 끝났다.
순전한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은 능력으로 역사하여 큰 부흥을 주셨다.
17세기 청교도 시대에 부흥이 많았고, 그 다음 18세기에까지 부흥을 주셨다.
종교개혁 시대에 부흥을 주셨다. 순전한 말씀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흥을 흉내내고 조작하는 부흥주의가 있을 뿐이다.
순전한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기갈의 시대가 된 것이다.
순전한 말씀은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전하고 가르치고 예배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과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할 때
우리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된다.
사람의 말과 지혜로 교훈으로 삼아 가르칠 때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삼가야 한다.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을 다 무너뜨려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릴 수 있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들은 견고한 진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2. 모든 이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해야 한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우리가 정말 성령으로 말씀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였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 속에 있는 사람의 지혜와 초등학문들을 배설물처럼 버려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해로 여기고 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다.
내가 나의 몸을 쳐서 진리의 말씀에 복종시켰다고 했다.
우리는 왜 버리는 것이 없는가?
모든 이론은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은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그런 반성조차 결심조차 시작도 않는 것을 본다.
성경 말씀을 들어도, 보아도, 심지어 선포하기까지 하면서도, 그 필요성조차 못 느끼고 있다.
청교도신학을 몇 년씩 공부하면서도 유익하던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과하다 하고 콧등으로 듣고 마이동풍일 뿐이다.
바울은 그 유익들을 버렸기에 그리스도로 채울 수 있었고 말씀과 성령으로 채울 수 있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다.
헌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한다.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그리스도인의 옷을 벗고 이면적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어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살았고 지금도 내 속에서 살아서 나를 조종하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될 수 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암흑의 사사시대로 만들었다.
그 자기 소견에 옳은 생각이 바로 사람의 지혜로, 세상의 초등학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자기 소견에 옳은 생각이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차 있다.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전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가득차 있는 사람의 지혜들을, 세상의 초등학문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떡으로만 살기에 익숙한 우리의 속사람들을 말씀으로 사는 속사람으로 바꾸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광야길을 걷게 하시는 목적이 바로 말씀의 사람, 하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것이다.
잠깐 받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가 견고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모든 것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모든 이론, 모든 생각이 우리를 긴긴 고난으로 들어가게 한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의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무기로 삼기에 고난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거기에 축복이 있었고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율법책은 유대인들에게 항상 있었고 성경책은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있었다.
문제는 그 해석이요 능력이다.
순전하게 해석된 진리의 말씀만이, 성령의 지혜가 가르친 말씀만이,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사람의 지혜의 아름다움과 설득력으로 가르친 말씀은 우리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머물게 한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르치는 말씀만이 우리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사역을 수행했다고 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구하고 의지하고 사모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붙들되, 사람의 지혜와 초등학문으로가 아니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붙들도록 힘써야 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한다.
순전한 진리의 말씀, 곧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진리의 전통이 분명 있는데도,
목사들과 교인들은 도무지 알려고도 배울려고도 하질 않는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유일한 길인데도 말이다.
내가 갖고 살고 있는 모든 이론, 모든 생각들이 사람의 지혜이고
세상의 초등학문들인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도, 무관심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도,
교회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전통으로 돌이킬려고 하질 않는다.
참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조차 적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고 넘쳐난다.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인도한 거짓 선지자들이 현대 교인들도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한가족교회와 청교도아카데미의 사명이 얼마나 큰지를 기도하고 가슴에 담을 뿐이다.
우리는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밤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고 형통의 길이고 영광의 길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공부하고 연구해야 의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그에 더하여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의지해야 한다.
그 둘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우리의 의의 무기이고 그 무기로 세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과 따로 노는 성령의 추구는 광신의 신비주의에 떨어진다.
성령과 따로 노는 말씀의 추구는 메마른 지성주의에 떨어진다.
말씀과 성령은 항상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청교도들이 그러했다.
한가족교회와 청교도아카데미에 말씀을 뜨겁게 공부하는 용사들이 가득찰 날이 올 것이다.
성령을 부어주셔야 말씀을 뜨겁게 공부하지요.
헤브론에 오르는 날,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한다.
주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주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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