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커닝함의 생애, 원칙은 희생 위에서 승리한다/ 이안 머레이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머리임을 견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1843년 5월 18일에 일어났다. 그날, 총회 석상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총대들이 일어나 온건주의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들이 힘들게 연관 지어 온 스코틀랜드의 제도적 교회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보통 60∼70여명 정도가 최종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다 일어섰을 때 ‘다수가 일어섰고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 광경은 너무나 놀라웠고, 경악 그 자체였으며,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451명의 목사들이 분리되어, 즉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교단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에 수반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수년 동안 그들이 설교하던 교회당은 즉각적으로 닫혔으며, 그들이 거주했던 사택도 다 비워 주어야 했다. 예배당과 사택은 지난 세월 동안의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진 곳이었다. 어떤 곳은 그들의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커닝함의 목소리는 트리니티 칼리지 교회당 강단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고, 베너만의 설교 역시 오르미스톤 교구 교회당 벽에 울려 퍼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은 슬픈 날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원칙은 희생 위에서 승리한다.
성경이 인간의 법률들을 이긴 것이다.
이로써 전 스코틀랜드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인하여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본을 직면하였던 것이다.
커닝함과 베너만이 섬겼던 시대에 에든버러의 뉴칼리지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교로 발돋음했다. 모든 과목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자들이 되도록 사람들의 지성과 심령과 양심을 단련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최고의 지성을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서 도덕적인 정직성과 영성 역시 학생들에게 가슴 깊이 수용해야 할 것들이었다.
히브리어 교수 존 던컨은 새해를 맞는 첫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원히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I wish you a happy eternity!)라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청중들은 모든 교수들이 그와 같은 바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 던칸 교수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강의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들로서 강의하였다. 커닝함은 시급히 요구되는 실천적인 의무를 명확하고 당연히 해야 하며, 거부할 수 없는 의무감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커닝함이 마지막 기고한 논문은 “칼빈주의의 실천적 적용”이었다. 그는 베드로전서 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의 본문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기에 적합한 전형적인 영적인 사람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자유교회에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일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모두 커닝함과 그의 동료교수들이 이끈 후보생들을 위한 훈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문점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 신학교는 처음부터 학생들로 넘쳐 났으며, 40년이 흐르는 동안 약 1,300명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커닝함은 1859년에 자유교회 교단의 총회장이 되었다. 총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미국과 울스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의 교훈들을 귀담아들으라고 촉구하였다. 그해 총회석상에서 그는 연설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부어 주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마음속 가장 큰 소망으로 삼으십시오 --- 하나님께 우리가 끈덕지게 졸라서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듯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듯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섬김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 성결케 하십시다”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총회가 커닝함으로부터 들은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였고 마지막 연설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한쪽 시력을 상실했고,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퇴하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860년에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부흥들이 일어났다. 이로써 그의 소원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학교수들 중에서 부흥에 대한 관심을 두드러지게 표명하는 자를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뉴칼리지에서 100년 전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커닝함은 부흥을 다룬 책들을 매우 귀히 여겼다. 그리고 그 자신이 1842년에 17세기 초의 부흥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분이었던 로버트 부르스의 생애와 설교들을 직접 편집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커닝함은 신학생들에게 조나단 에드워드의 『뉴잉글랜드에서의 부흥에 관한 소고』와 같은 책들을 읽으라고 촉구하였다고 전해진다. 무디 스튜어트 박사는 “윌리암 커닝함 다음으로 번스만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부흥되기를 깊이 갈망하고 평생토록 사모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직신학 교수이 제임스 베너만의 설교는 1860년의 부흥의 때에 널리 사용되었다.
커닝함은 1860년 총회 개회예배에서 구속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보나는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교였다고 하면서 “그의 가장 훌륭한 설교”라고 극찬하였다. 1861년 12월 13일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그의 옛 친구들과 동료들인 제임스 배너만과 부카난을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의 영혼이 오래전에 안식처를 찾았던 기초에 대해서 그들에게 언급한 후에 다음과 같은 말로 기록된 그의 감동적인 고별인사를 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뉴칼리지 학생들에게 남길 만한 말씀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그는 아버지로서 가지는 관심으로 잠시 등을 기대며 생각한 후, “이 말 외에는 나는 특별히 할 말은 없습니다. 먼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리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전 생애를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하십시오. 문자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신약성경에 충실한 능력있는 사역자가 되도록 노력하라 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애정어린 마음으로 고별인사를 했다.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그들의 손을 부여잡고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반복하였다.
“짧은 험한 세월이 지났구려.
이제 우리는 저 행복한 항구
죽음이 우리 친구 사이를 갈라놓지 않는
더 이상 헤어짐이 없는 그곳에 도달하네.”
이 구절들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친구들에게 “우리는 그 우편에서 만날 것일세”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스코틀랜드의 가장 강하고 고귀한 아들 중 한 사람이자, 사도 바울 시대 이후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커닝함이 세상을 떠났다.
배너만은 제임스 부카난과 함께 커닝함의 저작들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의 귀한 책 『영감: 성경의 무오의 진리와 신적 권위』라는 책도 출판하였다.
- 윌리엄 커닝함, 『역사 신학 1권』, ; 이안 머레이, ‘윌리엄 커닝함의 생애, pp 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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