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코티안 알프스의 이탈리아 개혁 교회, 보두아, 피레네 계곡/ 권현익

강대식 2021. 12. 12. 14:17

코티안 알프스의 이탈리아 개혁 교회, 보두아, 피레네 계곡/ 권현익

 

거룩한 카톨릭 교회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로마 교회는 점차 주교(교황) 한 사람이 좌우하는 로마 카톨릭교회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스스로 교회의 황제됨을 선포하였으며, 교황 우월주의, 면벌부의 능력, 연옥과 화체설, 성모, 성인의 중보 기도, 성모 마리아 숭배, 성인들 예배, 성상과 유물 숭배 교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사도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보편적 감독, 지상의 하나님이 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카톨릭 교회와 무관하게 되었다.

 

반면 개혁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며 성경을 근거로 한 교리와 신앙적 내용을 유지함으로 소수였으나 유일한 카톨릭 교회의 상태로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왔다. 397년경에는 코티안 알프스 지역에 작은 무리의 개혁 교인들이 존재하였는데, 그 한적한 산악 지역에 로마 교회와 무관하게 리옹의 개혁 교회처럼 교인들이 선출한 감독과 장로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로마 교회 안으로 침투한 그 부패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예배가 있었고, 성상 숭배나 성인 숭배도, 성유물 예배도,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미사도 없었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도 결혼을 허락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만을 공경했다. 그리고 로마 교황을 이단이라고 지칭하였던 선조 개혁자들의 그 길을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로마 교회에 항의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명하는 놀라운 삶을 살았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 교회로부터 397년에서 1100년까지 계속적으로 계곡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인 보두아라 불렸다.

 

이 지역에 열 번째이며 마지막 고트족 왕국인 롬바르드왕국이 567-568년에 세워지면서 보두아들은 롬바르드 왕국의 보호 아래 지내면서 로마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롬바르드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 지역은 독립된 지역으로 남았고, 튀랭의 주교 클로드(780-827) 시대에는 보두아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두 개혁 교회는 서로가 교통함에 알프스라는 큰 장벽이 있었음에도 두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피에몽 계곡을 중심으로 수시로 교류하며 하나의 신앙적 공동체로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까쳤다.

 

4세기말 롬바르디아 지역에도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신자들이 있었으며, 피레네 산맥 근교 남부 프랑스 출신의 비길란티우스가 성지 순례, 금식, 독신 생활을 반대하다가 이곳 계곡에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6세기 말 마르세유의 주교 세레누스는 첫 번째로 그의 교구 내의 성화를 모두 제거한 590년과 604년 사이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신의 무분별한 열심 때문에 발생한 성인 숭배를 막기 위해 저는 성인들의 상을 깨뜨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성인 숭배를 금지했다면 우리는 당신을 전적으로 지지했을 것입니다라며 교황을 향해서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잘못을 비판했다.

 

코티안 알프스 피에몽에는 오늘날에도 30,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1655년 대학살로 큰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1800년경 13개 지역의 발도인들 교인 수와 로마 교회 교인수를 비교하면 피에몽 계곡은 여전히 발도인들의 성지처럼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18,600명 대 1,710명이다.

 

피레네 계곡의 개혁주의

프리실리아누스는 원래 불신자였으나 성경을 통하여 개종한 후 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다가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아빌라의 주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포르투갈과 알비인들의 주요 지역인 아키텐 지역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시기하는 주교들이 생겼고, 그들은 이타키우스와 같은 저급한 주교의 사주를 받아 그와 함께 지도자 여섯 명(장로 2, 집사 2, 시인 라트로니아누스, 보르도의 점잖은 부인 유크로키아)을 체포하여 고문한 후, 385년 트레브에서 참수시켰다. 이는 그리스도교 군주가 종교적 이유로 피를 흘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와 투르의 주교 마르탱은 이런 행동에 오래 기억될 만한 항의를 하였고, 이타키우스와 처형에 동의한 다른 주교들과 신앙의 교제를 단절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의 추종자들 일부는 피레네 산맥으로 피신한 후 그곳의 기존 개혁 집단에 합류하여 스페인 지역의 개혁주의 온상으로 오랫동안 역할을 감당하였다. 마치 피에몽 계곡처럼 이 지역은 마호메트 세력이 정복해 올 때에도 저항하였던 곳으로, 오래전부터 개혁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전통적인 지역이었다. 이곳은 훗날 프리실리아누스처럼 성경을 신앙의 근본에 두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활하는 알비인들의 주요 거점이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비길란티우스와 튀랭의 클로드와 같은 소중한 개혁자들이 등장한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218-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