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의 모습/ 권현익
‘고귀한 교훈’에 따르면 발도인들의 시작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 314년에 로마의 주교가 되었던 실베스터의 시대이다. 어떤 이유로 기독교가 공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토록 치명적인 타락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사도적 전통 위에 세워진 ‘정통 카톨릭교회’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복음이 들어와 교회가 세워지는 시간 순서로 보아도 안디옥 교구, 예루살렘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 로마 교구 가운데서 가장 늦은 때에 복음을 접하게 된 변방의 한 교구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 제국의 통일성 유지를 위한 필요성 때문에 로마 제국의 중심지에 있었던 로마의 주교에게 현저히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이 로마 주교가 타락하도록 부추긴 효과를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로마 교구가 다른 교구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려고 ‘콘스탄티누스 기증서’라는 거짓된 문서를 황제 사후 500년이 지난 8세기에 작성하는 등 온갖 형태의 위조, 왜곡, 사기들을 동원하였지만, 교회를 더 강하게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참 교회로부터 현저히 그리고 철저히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신앙의 자유와 함께 로마 교구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많은 부와 영토와 같은 혜택들은 타락의 씨앗들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 교구는 교구 확장을 위해 성직 매매와 이교도의 여러 가지 관행을 수용하였고, 아무런 가르침이나 훈련이 없이 이교도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런 것들이 로마 교회 타락의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에 ‘남은 자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발도인들 교회는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을 수는 있었으나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들은 잃고 말았다”고 판단하게 된다. 12세기 로마 교회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베르나르 클레르보조차도 “로마 교회의 타락은 거짓 ‘콘스탄티누스 기증서’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단테 역시 「신곡」(1308-1321)’ ‘지옥’ 편에서 “콘스탄티누스여, 당신의 개종이 큰 악이 아니라 부유한 사제가 그대에게서 받은 그 선물이 악이었도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후 로마 교회가 제국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서유럽을 장악하게 되면서 375년부터는 로마 주교가 아니라 ‘교황’이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세계교회의 영적 수장으로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476년 서로마 제국이 패망한 뒤 로마 주교는 서로마 제국의 빈자리에 종교계의 황제격인 ‘교황’으로 들어와 앉아서 무소불위의 교회 권력을 잡는다. 496년 콜로비스의 개종을 이용하여 세력화된 교권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조직화하기 시작했고, 로마 교회는 오늘날의 교황 체제를 견고히 한다. 533년에 와서는 다시 한번 로마 주교를 세계 교회 수장으로 선포한다.
무리한 교회 확장을 위하여 이교도의 습속들을 수용하면서 4세기 즈음부터 과도한 금욕, 금식과 독신을 권장하였고, 이교도의 여신에게나 해당될 법한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까지도 주장하게 되었다. 성찬은 초대교회에서 행해졌던 것과 달리 완전히 변질되어 가히 신성 모독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사제는 말 그대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구약의 제사장 역할을 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죄 사함을 위한 성전 제단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매번, 다시금 또 다시금 고난을 받으시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인 헬레나(250-330)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326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 많은 성물을 발견하였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와 그때 사용한 못 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성유물에 관한 관심이 변질되면서도 더욱 고조되어 그 이후로는 성인의 신체나 성인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접촉하기만 해도 성결함을 입게 된다는 난센스를 교리처럼 받들어 믿게 만들었다.
성인 유골들이 많아지면서 성지 순례는 자연스러운 면벌의 기회로 프로그램화 되어서 성지 순례가 의무화되기까지 했다. 로마 교회의 비성경적 교리들은 다음과 같은 시대를 거치면서 결정되었고 쌓여 갔다. 300년경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십자가 형상 사용을 결의하였고, 320년에 촛불 사용을 결정하였으며, 375년에 천사와 성유물과 성상을 숭배하기 시작하였고, 394년에는 미사가 매일의 예식으로 정착하였으며, 500년에는 사제들의 독특한 예복 착용을 결정하였고, 593년에 와서야 연옥 교리를 확립했으며, 600년에는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기도를 허락했다. 610년에는 최초의 공식 교황으로 보니파키우스 3세를 선언하였고, 786년에 십자가, 형상, 성유골 숭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11세기에는 미사가 희생 제사로 발전하였다. 1079년 사제들의 독신행활을 법제화하였으며, 12세기 패트루스 롬바르두스에 이르러 구원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7성사를 확정하였고,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는 화체설을 그들의 성찬 교리로 확립하였다.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208-213
'성경도 아카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교도 아카데미 독서목록 2022 (0) | 2021.12.06 |
---|---|
저항(protest)하는, ‘남은 자’들의 개혁 교회, 리옹과 피에몽/ 권현익 (0) | 2021.11.30 |
서유럽 종교개혁의 근원인 발도인들(Waldenses)/ 권현익 (0) | 2021.11.29 |
“영과 진리”의 예배는 성경의 진리를 밝히고 깨달아 믿음으로 동의하며 고백하는 예배이다/ 장대선 (0) | 2021.11.22 |
묵상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에서 사용할 가장 중요한 실천방법 중 하나다/ 김재성 (0) | 2021.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