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protest)하는, ‘남은 자’들의 개혁 교회, 리옹과 피에몽/ 권현익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지역 교회에서 파송한 전도자들이 세운 로마 교회는 곧 사도적 교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모하고 말았다. 이를 지적하고 항거하는 개혁자들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핍박하고 폭력을 써서 침묵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런 영적 암흑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숨겨 놓으심으로써 구원의 복음을 드러내고 증거하게 하셨다.
십자군 전쟁 이전까지 종교개혁 운동은 소규모 지하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들과 왕들이 예루살렘 성지 회복에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박해의 도구였던 군사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그 시기 동안에 개혁 운동은 대규모 운동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거룩한 카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며 온 세계에 흩어져 있으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몸에 속하여 구원받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타락한 로마 교회가 ‘카톨릭교회’라는 명칭을 독점하며 도용하고 있지만, ‘카톨릭’은 ‘보편성’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한 주님(one Lord), 한 신앙(one faith), 한 세례(one baptism)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교회들을 오염시키자, 유럽 여러 지역에서 특히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 지역의 교회들이 이에 반대하며 항거하였다. 프랑스에는 이레나이우스가 있었고, 피에몽 계곡에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있었다. 이 시기에 동방의 남은 자들이라고 불리며 진리를 위해 핍박을 받았던 바울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동서방의 남은 자들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 시기에 프랑스 투르에서는 베렌가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등장하여 진리를 변호한 반면, 이탈리아의 튀랭, 밀라노, 아퀼레이아의 교회들은 마침내 로마 교회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밀라노의 파타린인들과 튀랭 근교 코티안 알프스 계곡의 보두아들은 사도적 신앙에서 떠나기를 거절하고 성결을 유지하였다.
이후 계곡의 사람들은 배교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 교회들과의 영적 교제를 거절하였고,
‘보두아’라는 이름은 로마 교회의 오류에 반대하는 자들이라는 일종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참 교회는 이탈리아의 보두아와 프랑스의 발도인들 특히 알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갔기 때문에, ‘알비인들’로 불린 발도인들은 피에르 브뤼, 앙리 로잔, 피에르 발도, 아르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계속 등장하여 잉글랜드, 게르만, 보혜미아까지 퍼져 나갔다.
롬바르디아 지역에 많은 개혁자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롬바르드 왕국이 6세기부터 롬바르디아 지역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일대를 정복하므로 교황에 대한 방패막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롬바르드 왕국이 8세기 후반에 패망하면서 교황청의 간섭은 본격적으로 노골화되었다.
리옹은 프랑스 개혁 교회의 산실이었다.
리옹은 종교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있었던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유명 개혁자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로 오랫동안 개혁주의 사상의 근원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도 출신의 포티누스와 이즈미르 출신의 이레나이우스는 리옹에서 신실한 설교자로 유명세를 갖고 활동하였다. 폴리갑은 네다섯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리옹과 근교 도시인 비엔느 등에 교회들을 세웠고, 이 교회들은 그 지역에서 노회를 형성할 정도로 활발하게 성장했다.
이런 이유로 우화 설교들은 사라졌고, 초대 교회의 관행을 따라 장로는 회중 공동체가 직접 선출하였다. 이는 ‘주교가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이 부정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목자들을 장로들의 안수로 세웠기에 감독직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로, 목자, 집사들도 세웠다. 포티누스는 90세가 넘은 나이에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존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로마 제국이 프랑스를 정복하고 있던 3세기에도 알메리쿠스와 그의 여섯 명의 제자들은 “성찬의 빵은 다른 빵과 동일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빵 안에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전이나 제단을 세우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주장하므로 파리에서 다 함께 화형을 당하였다(296년).
그들은 죽어 사라졌지만,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던 그 자세와 그들의 그 가르침은 이어졌고, 8세기에 레이드라드 주교가 세운 성경학교와 그의 가르침을 전승한 아고바르, 클로드와 같은 개혁자들이 계속적으로 이 도시에서 가르쳤다.
리옹과 발도인들의 집산지인 피에몽에서는 개혁자들과 그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교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개혁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 이후 1500년간 프랑스에서 이 항거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21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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