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9 주일설교
본문: 이사야 48:6-11
제목: 새 일을 듣게 하노니
1.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48:6-7)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만유 위에 만유를 통일하며 만유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하여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새 일을 창조하시며 오늘 이전에는 듣지도 못하였던 은비한(감춰진) 일을 창조하시며
역사와 사람의 운명을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 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리라 하였느니라 ---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히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17-22)
하나님은 너희 곧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우리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마땅히 행할 길은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48:4)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48:1)
모세를 통하여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주셨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번성하는 길이라고 하였겄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지켜 행하지는 않았다.
그 이스라엘은 바로 현대의 교인들이다.
우리 말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읽지 않고 먼지가 쌓이도록 모셔만 둔다.
또 유행병처럼 요절 외우기, 성경 통독, 노트에 옮겨 쓰기들을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은 자기 유익과 재물쌓기와 축복과 출세와 성공만이 차지하고 있다.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그대로 살 뿐 다른 것이 없다.
이 세대를 그대로 본받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는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기록되어 있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분별할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완고하며 그 목은 쇠의 힘줄이요 그 이마는 놋이었다.
네 목은 쇠 힘줄 같아서 잘 숙여지지 않는다. 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는다.
이마는 놋이어서 뻔뻔스럽고 오만 방자하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마음이 원하는 길로 쏜살같이 달려만 간다.
정말 내가 유익과 행복과 번성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그토록 원하는 강 같은 평화도,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도, 주의 말씀에 유의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사막에서도 목마르지 않게 하신다.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어 물이 솟아나게 하신다.
만나를 공급해 주시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신다.
악인들처럼 말씀과 관계 없이 사니 평강이 없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거룩과 가장 먼 것이 죄이고, 말씀에의 불순종이다.
거룩한 마음과 거룩한 삶이 없다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대로 맺어질 수가 없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진노를 내리실 뿐이다.
불안과 우울증도, 유행병과 자연 재해들도, 사고와 망하는 것도 그 진노의 일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진실로, 그리고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께로 정직하게 돌이켜야 한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길 장사는 없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형통과 행복을 누릴 길 없다.
여러분이 많이 쌓아 봐야, 높이 올라가 봐야, 훅 불면 날아가고 만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돌이키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고
마땅히 행할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세상에 쏟는 관심과 열정의 십분의 일이라도 바쳐서 성경을 공부하는 데 쓰라.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 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옛 것은 지나가게 하시고 새 것이 되게 하시고,
그 위에 새 일을, 새 역사를 창조하게 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2.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였노라”(10절)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또 쓸만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게 하신다. 고난의 용광로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눈물의 골짜기이다.
광야는, 고난의 풀무불은, 위험하고 광대하다.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고 신세와 꼴이 말이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면 하루 아침에 다 하실 일도,
하나님은 쇠힘줄 목, 놋 이마를 가진 인간들을 통해서 하실려고 하신다.
그러니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고난의 풀무불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아브라함은 25년, 모세는 40년,
젊은 요셉과 다윗은 십수년,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해야 했다.
이스라엘 광야 40년은 출애굽 1세대의 무덤이었고 가나안 1세대를 위한 연단의 시간이었다.
광야와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하지 않고 왕이 된 사울과 솔로몬은 결국 몰락하였다.
자신만 망하고 몰락했으면 좋으련만 자식들을 망쳐 놓았고 민족이 나누이고 몰락하게 하였다.
쉬운 길 벼락 출세 순탄한 인생이 좋을 것 같지만, 사람도 심는 대로 거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처럼 도자기처럼 연단하지는 않으시고
풀무불에서 건져 내신다.
사람은 완전히 구울 수는 없고 자율적으로 순종하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풀무불에서 건져내시고 새 존재로 새 일을 하게 하신다.
성경의 역사, 기독교 역사는 수난의 역사와 함께 새 창조의 역사인 것을 보아야 한다.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고, 순교의 역사 없이 참 교회의 역사는 없다.
인간은 연단의 고난 없이 영광만 취할려고 한다.
현대 교회도 유대 교회,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역사 5백년을 어둠으로 만들었다.
4천년 유대 교회, 1천년 로마 교회와 다른 것이 있다고 내세울 것이 있는가?
참 교회는 이들의 만행과 위선과 거짓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그 진리를 목숨 바쳐 살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진정으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사람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지 못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고 사탄의 권좌가 자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쓰임 받는 교회, 새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해야 하고, 그 풀무불에서 건짐을 받아야 한다.
자신도 개혁되지 못한 사람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무슨 수로 개혁할 수 있겠는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개혁 없이는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개혁될 수 없다.
개혁되지 않는 개인과 사회는 어둠으로 멸망으로 달려갈 뿐이다.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살기 위해서는 개혁은 절체절명, 절대절명이다.
몸도 목숨도 다 될 만큼 절박한 위기이다.
다윗을 헤브론에 오르게 한 것은 개인의 영달과 영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이 망친 개인과 사회와 나라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으로 그는 개혁을 이루고 번영을 이루었다.
개혁 없이는 부흥도, 번영도 없다.
광야 생활,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연단하여 얻은 마음의 완전함, 손의 능숙함이었다.
여호수아도 다 이루지 못한 가나안 땅의 완전한 정복을 다윗이 다 이루었다.
군대가 많아서 정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정복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 오직 말씀으로 통치하여 공의와 정의와 거룩함을 이루었다.
다윗은 말씀의 사람이 되었기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
그 외에 형통한 사람이 되는 다른 길은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말씀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이 축복과 영광을 구하고 있다.
떡으로만 돈과 재물로만 사는 사람들은 되는 것 같다가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이고 인류의 역사이다. 개인의 역사이다.
말씀에로 돌이켜야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
고난의 풀무불은 낮추기도 주리게도 하시면서 말씀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것이다.
오늘 내게 명하는 말씀에 순종해야,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다.
명령하시는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
내가 분부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말씀을 떠난 사람은 형통일랑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3.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11)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흔들리기 쉽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창조하시기로 하신 일을 반드시 행하시고 이루신다.
하나님을 위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들려 주셔서 알게 하신 새로운 일은, 헤브론의 사역은,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다른 자에게 그 영광을 주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신다.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48:15-16)
고난의 풀무불에서 건져낸 자와 함께 그의 영을 보내어 그 길이 형통하게 하신다.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부으셔서 그의 잔이 넘치게 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능하고 강하심을 영광 가운데 나타내셔서 형통하게 하신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신 나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주시고 알게 하시는 것이다.
다윗의 헤브론 역사는 바로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신 나의 헤브론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들려주시고 알게 하신 헤브론의 역사는,
하나님의 새 창조요 행하시는 새 일이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루시는 대역사이다.
개인과 사회를 말씀의 진리로, 그 진리를 사는 빛과 소금이 되어, 개혁하여 가는 것이다.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신 자의 몫이다.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똑같이 이루어 가신다.
“그의 종의 말을 세워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은 중건되게 하며, 성전은 건축되게 하며, 황폐한 곳은 복구되게 하신다.
병거와 군대가 많아서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서,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신 자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 모든 영광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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