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견해의 옳음이 형제 사랑보다 우선일 수 없다/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22. 9. 20. 18:46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가진 어떤 옳은 견해들보다 중요하다/ 로이드 존스

 

바울은 여러분의 형제에게 거침이 될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단어를 사용한다. 첫째로 ‘거침돌’이라는 단어이다. 어떤 사람이 가는 길에 바위나 돌맹이, 또는 어떠 장애물을 놓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단어를 쓴 것이다.

 

베드로는 같은 단어를 베드로전서에서 쓰고 있다.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7-8).

 

바울이 ‘부딪힐 돌’과 ‘거칠 것’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형제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범죄를 저질러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저는 믿는다. ‘거칠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 사용된 덫이나 올무를 뜻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견해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진술을 하거나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의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다른 사람들도 형제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은 3절에서 그 점을 완벽하게 나타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리고 9절에서는 더욱 강하게 반복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잘못은 교회에서 치명적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논증을 요약하면서 이 가르침을 반복한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10:29). 여러 교회들이나 여러 지역들을 다루면서 사도는 부단히 이 요점을 반복해야 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볼 때 옳은 것만을 생각해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 형제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신약적 호소의 한 부분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잡하시기 직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주님께서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3:35). 이 점은 교회에서 항상 견지해야 할 통제 원칙이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에서 떠나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결정들에 있어서 잘못되어 나갈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논의하든지, 우리는 형제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아무리 다른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할지라도 특별한 결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이 정신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정신의 전면에 그 정신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대번에 갈피를 잃게 되어 있다고 저는 반복하여 말씀드리고 싶다.

 

사도들은 그들의 여러 서신들 속에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할 필연성을 부단히 가르친다.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우리의 삶 전부를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신다는 의식의 통제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서로 간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계명들은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9-10).

 

바울은 다시 한번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어떤 견해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있다. 우리의 견해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형제를 사랑해야 함을 잊고 있다면 그 바른 견해가 심각한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도는 더 나아가 14장에서 그 가르침을 다음의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절). 어떤 사람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옳은 생각 때문에 선보다는 해를 끼칠 만큼 나쁜 정신으로 그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우리 중에 자신의 견해들을 피력하려고 항상 벼르며, 특히 거침없이 어떤 어려움도 없이 자기 의견을 입심 좋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 말씀의 요점을 보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되기를 원한다. 저는 일찍이 그것을 ‘계산 조견표 정신’(ready rekoner mentality)이라고 부른 바 있다. 문제요? 대답이 여기 있다. 문제없다. 모든 것이 다 정립되었으니까요!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기독교회 안에서는 난제들을 그런 식의 비난받을 방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들이고 그 정황을 참작해야 한다.

 

바울은 한때 가장 협소한 민족주의자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유대주의자요 바리새인이요 일등급 율법주의자였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이러한 진술을 하게 만든 오직 한 요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거듭남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되 정말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로 여기던 것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선회할 정도로 바꿀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님뿐이시다. 우리는 여기 바울의 말 속에서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여 주는 위대한 예증들 가운데 하나를 접하고 있는 셈이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14권』, pp 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