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 마틴 루터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우리에게 오는 환난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오는 환난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오는 환난에서 좋지 않은 부산물이 생겨나는 것은 환난 자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을 이겨내는 자의 연약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환난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경외함으로 떠받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환난에 관하여 잘못 생각해서, 환난의 본질, 힘, 작용(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그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때에 그런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난다.
환난을 통해서 그들은 최고도로 연단되고 정화된다. 환난은 우리 안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더 온전히 계발시킨다. 어떤 사람이 육적이고, 연약하고, 눈멀고, 악하고, 화를 잘 내고, 콧대가 높다면, 환난은 그를 더 육적이고, 연약하고, 눈멀고, 악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반면에 “곤란 중에 나를 크게(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시편 4:1의 말씀처럼, 어떤 사람이 영적이고, 강하고, 지혜롭고, 경건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그는 더 영적이고 힘있고 지혜롭고 경건하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환난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짜증이 많다는 사실을 드러내서 입증해 줄 뿐이다. 따라서 누구나 환난을 통해서 자기 마음이 본래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겉으로 거룩한 성물인 십자가를 숭배하면서도 환난과 시련을 싫어하고 거기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은 무지하고, 유치하며, 위선적인 자들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는 마태복음 10:38의 말씀처럼, 성경에서는 환난을 일종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이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회교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을 누구나 명심해야 한다. 사도행전 14:22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 주님을 ‘구주’,
‘환난 중에 돕는자’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환난을 견디고자 하지 않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영예로운 직함들과 명칭들을 빼앗는 것이 됨을 의미한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결코 구주가 되시지 않을 것이다.
연단은 환난의 목적 또는 환난이 가져다주는 미덕이라는 좋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연단시키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의로운 자로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여호와는 의인을 연단하시고(‘감찰하시고’)”라는 시편 11:5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의 불을 통하여 연단하신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을 그 자체로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시편 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환난은 사람에게서 그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서, 사람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또한 환난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선한
행위들 속에서 도움과 구원을 찾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는
시편 3:3의 말씀처럼, 환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절망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만들고 자기 자신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게 만들어서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만을 찾게 만든다.
이것이 “소망”이 의미하는 것인데,
환난에 의한 연단을 통해서 그러한 소망이 우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미덕들에 의지하고 환난을 인내하지 않고 연단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자들은 최후의 시련이 닥쳐와서 그들의 모든 미덕들과 공로들이 사라져 버리고,
영원한 절망 속으로 가라앉는 그 날이 오면,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눅23:30)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이 소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전혀 소망이 아니었고,
단지 그들 자신의 행위들과 의에 대한 잘못되고 오만한 신뢰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 마틴 루터, 『로마서 주석』, pp 115-117
'루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롬7:6) / 마틴 루터 (0) | 2012.03.16 |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6:14)/ 마틴 루터 (0) | 2012.01.24 |
원죄란 무엇인가? /마틴 루터 (0) | 2011.12.26 |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2) (0) | 2011.11.23 |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1) 율법의 문제 (0) | 201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