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 5:1-10
1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외적 표시이고 상징이었다.
할례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의 전제와 함께 유효케 된다.
그런데도 구약의 유대인들은 할례만 받으면 선민이 되고 구원받은 줄로 알았다.
그래서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구원 못 받은 개 취급하였다.
최초의 할례인 아브라함의 할례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 인침으로 주신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살갖만 찢고 그것을 자랑하면서도 마음은 찢지 않아서 문제였다.
할례는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
스데반도 유대인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했다’고 했다. (행7:51)
그래서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린다고 했다.
모세도,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했다.(신10:16)
예레미야 선지자도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마음 가죽을 베라’고 하였다.(렘4:4)
할례는 받고, 악행은 악행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그들이 다시 할례를 받도록 유혹한 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유대 종족으로부터의 파문과 축출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6:12-14)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육체로 자랑할려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은 가정교사가 되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학문이었다.
할례를 앞세우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행위를 앞세우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외식과 불법을 일삼고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였다.(눅18장)
사람이 자기 행위를 의롭게 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의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넝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할례 받는 일이 적은 일이 아니다.
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마련이다.
다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의 멍에, 종의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으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 종의 멍에를 다시 메는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한 심판이 기다릴 뿐이다.
2 십자가에서 주신 자유에 굳게 서라
할례를 받고 율법 안에서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로 인정을 받고 구원도 받을려고 한다.
도덕적으로 조금 개선되고, 정치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지면 구원이거니 한다.
그것은 구약 4천년, 이스라엘 패망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패망과 악순환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발전도 행복도 구원도 없다.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 안에 있는 한, 죄의 오염과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죄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옥에 몰아넣고 사망의 길로 인도한다.
사람들은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인 줄로 착각을 한다.
신앙을 갖게 되면 마치 맘대로 하는 이 자유를 못누리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자유, 사람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종의 멍에, 노예의 멍에이다.
나를 쥐고 통제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이, 죄이고 육체이고 세상이고 사탄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이 진리를 깨닫지를 못한다. 비극이다.
예수가 없는 자유, 진리가 없는 자유는, 죄와 육체, 세상과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이다.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해방되지 못하면, 그것은 죄의 감옥에서 사는 것이다.
죄에서 자유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죄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이 어찌 자유하다고 하겠어요?
죄의 충동에 사로잡히면 꼼짝없이 그대로 행하고 마는 것이 어찌 자유라 하겠어요?
죄는 감옥을 낳고, 사망을 낳고, 심판을 낳고 만다.
모친과 큰 형을 살해한 그 차남은 노름 빚에서 자유할려고만 했지
그것이 감옥과 심판과 자기 아내의 사망을 낳는지는 생각지 못하였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처리하고, 그 죄에 대한 율법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한 것이었다.
죄와 형벌을 처리하지 않으면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로부터 자유하지 않고서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의 죄 값은 주님의 피를 흘리게 하고, 주님의 피 값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죄를 처리하고 죄를 이기는 방법이다.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피흘리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거기로부터 우리의 자유와 구원과 축복과 영광이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의 생각의 중심에, 삶의 중심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자유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자유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잘못된 가르침처럼,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죄짓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고 종의 멍에일 뿐이다.
죄짓지 않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주님 주신 자유를 살려면, 행동 전에 생각 때부터 잡아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가져오고 영의 생각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되어 있다.
주님이 십자가 희생으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육신의 생각은 주일에 세상으로 가자고 한다.
영의 생각은 주일에 교회로 가자고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시간 재물 열심을 어떻게 쓸 것인지 육신과 영은 갈등을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갈5:24)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아야 한다.(갈3:3)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린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갈5:16)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갈5:25)
3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주님 주신 자유로 굳게 설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워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메지 말라는 종의 멍에는 잘도 메면서, 주님의 멍에는 안 멜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주님께 헌신하는 주님의 멍에는 메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씀과 훈련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거듭났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일 것 같으면 그것은 쉽고 짐은 가벼운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울 때, 진정한 안식과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다.
진리를 모르고는 자유할 수가 없다.
어린 아이처럼 젖만 먹고 초보에만 머물다가는 양의 탈을 쓴 자들의 먹이감이 되고 만다.
말씀을 알아도 사는 훈련이 필요한 데, 모르면 당하고,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님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할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
주님 주신 자유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살기 위한 것이다.
주님 주신 자유는 군림하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한 자유이다.
주님과 말씀에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유이다.
경기하면서 룰을 지키지 않으면 난장판이 될 것이다.
자유는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순종 안에서 룰을 지키는 자유이다.
그럴 때 그 자유가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께 배워야 할 주님의 멍에는 십자가의 멍에이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매일 우리가 져야 할 내 십자가가 있다.
내 십자가를 매일 질려면,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들을 자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가 자랑스러워야 내 십자가도 감사한 마음으로 질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기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갈6:14)
십자가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 왜 어렵고 무거워 보이는가?
내 마음이 세상에 가 있고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사랑하면, 어려울 것도, 무거울 것도 없다.
우리가 마음을 찢고 마음 가죽을 베고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이 말씀으로 명하신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울 때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주신 자유가 굳게 세워질 수 있다.
주님께 배우는 주님의 멍에가 우리에게 안식과 축복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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