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첫째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7-8)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리적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믿음과 행위, 믿음과 실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 삶 전체는 믿는 것의 결과이다. 교리와 삶을 분리하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영혼에게 있어서 위험한 것은 없다. 신약의 어느 서신을 분해하더라도 일차적으로 인사를 한 뒤에 즉각 교리를 개요적으로 말하고 그 교리를 적용시키느라 “그러므로”라는 말을 도입한다. 만일 여러분의 삶과 삶의 상태가 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는 자비요, 호의요,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선한 의도이다. 일반적인 정의는 ‘받을 만한 공력이 없는 데도 주어지는 호의’이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기초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그것이 부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으로 인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평강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는 처음과 끝을 말하고 있다. 은혜는 샘과 원천으로서 이 평강의 대양으로 흘러간다. 평강의 소극적인 측면은 쉼이 없는 것, 다툼과 불확실, 불행의 반대이다. 적극적인 측면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다.(롬5:1)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원수로 투쟁과 갈등과 전쟁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강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원한이나 불만을 두고 있지는 않는가? 어떠한 의문이나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면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존재 전체가 열려져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평강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마음이 주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쉼이 없다”(어거스틴).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 속에 이 평강을 얻게 된다. 그리고 싸움은 끝이 난다. 염려가 완전히 다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어쨌든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된다. 주 안에서 쉼을 얻는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것이 바로 안정을 찾은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아직도 염려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기도할 때 자신과 다투느라, 자신을 설득시키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환경과 우발적인 사건과 뜻하지 않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안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른 것들과 더불어 안식하고 평강을 누려야 한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도 말씀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바울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소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묘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안다. 하나님은 한 철학자의 추상이 아니다. ‘X’, ‘절대자’, ‘영원자’ 등이 아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이시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로 생각하는가?
“and(와)”라는 접속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말해 주고 있다. 나사렛 예수가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심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 순전히 목회자적인 편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를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은혜와 평강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온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으로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울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목사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됨됨이 때문에 찬미를 받으셔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고, 부르셨고, 그들을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려야 한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은 허드슨 테일러나 죠지 뮬러처럼, 믿음의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구원받는 의미에서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특히 그가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 세상’이란 말은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악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확산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광고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가 광고이다. 그것은 알려진다. 그것이 바로 부흥이다. 하나님이 그 소문을 퍼뜨리신다. 수 세기 걸쳐서 일어났던 모든 부흥시기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셨다. 오늘날도, 또 언제나 그렇게 하실 것이다.
교회가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는데 관심을 쏟기만 한다면! 교회가 비용을 드려 전단을 뿌리고 광고는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1세기에 기독교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단순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았다.
여러분의 믿음이 소문났는가?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는가? 여러분의 믿음이 어떠한지, 여러분 같은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고 사람들이 몰려오는가? 우리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그러한 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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