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교회와의 연합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이 장의 제목과 관련하여 직접 유추할 수 없는 세 가지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이 다 우리의 것을 간주되고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의의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도 공평한 일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그 모든 고난의 열매와 유익에 우리가 참여하되, 마치 우리가 직접 그 일을 한 것같이 그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이 연합은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과 의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일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로 할 수 없이 영화로우시다.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라고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딘지 이치에 맞지 않게 보인다. 의인이 불의한 자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이 공정하고도 공평한 처사인가? 거기 어디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가?
1 교회의 구원을 위해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직무의 정당성
그러면 이 일의 공평성과 그 정당한 근거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모든 태한 백성들, 곧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아담 안에서 율법을 어긴 일로 인해 저주 아래 떨어졌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죽는 것과 영원히 죽는 것이 다 저주에 포함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죄가 심판받지 않은 채 그냥 간과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과 거룩과 진리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정하셨다면, 반드시 그들이 당할 그 형벌을 다른 데로 옮겨야만 했다. 그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 형벌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기에 그들의 죄가 형벌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 형벌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에게로 옮겨져야만 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 형벌이 옮겨지는 식의 전제는 기독교의 근본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계시의 기초이다. 가장 처음에 주어진 약속 안에서 그 점이 먼저 시사되었고, 그 후에 구약의 모든 제도들을 통해서 그것이 설명되고 확증되었다. 율법의 제사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과 용도는 형벌 받을 자에게서 그 형벌을 벗겨 대신 희생될 이에게로 옮기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것이 왜 공평하고도 공정한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드러난 말로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본성의 빛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행하실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엄명하셨다. 물론 그들도 죄인이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죄를 대를 이어 짓는다. 그러나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그들이 자기의 아버지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면,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합법적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잡히게 하신 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으며, 특히 므낫세 때에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벌하신 것이다(왕하 23:26-27).
가나안은 그 아버지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5). 사울의 일곱 아들들은 피에 굶주린 그 아버지의 잔악성 때문에 죽음에 처해졌다. 또한 다윗의 죄 때문에 칠만 면의 백성이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그 일에 관하여,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하 24:17)라고 슬퍼했다. 노아의 홍수 때 죽임을 당한 모든 어린아이들이나 영아들의 경우가 그러했고, 소돔고 고모라 불탈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이성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2) 이런 공의가 문란하게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시행하려면 언제나 특별한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한다. 죄를 짓는 자와 그 죄 때문에 심판받는 자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먼저, 형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려면 특별한 관계가 요구된다.
앞에서 말한 경우가 그러듯이 부모와 자녀 관계이거나 다윗의 경우처럼 왕이나 신하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짓는 자나 고통을 당하는 자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한몸 안에서는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당연히 다른 지체들도 고통을 당할 수가 있다.
또는 서로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형벌을 받는 자들은 그들과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형벌을 받는 것이 죄지은 자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이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그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심판의 일부가 자녀들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들의 대한 징벌의 가시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그 어떤 경우보다 더욱 긴밀하고도 친근하여 훨씬 더 높은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 공평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독특성과 고유성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와 세 가지 방면에서 관계를 맺고 계신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독특하고 고유한 방식을 채택한다.
(1)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첫 번째 관계는 육친적인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에서 낙 하셨다(행 17:26). 그러므로 모든 인류 사이에는 동족 관계, 또는 동맹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형제이며 이웃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워야 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개정).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
(히 2:14-15, 개정)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래서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말한다.
우리와 육신적으로 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하시기 위하여 무한히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분의 모습을 앞에서 이미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인성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고도 탁월하다.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의지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는 필연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나 선택의 행위로 그런 관계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다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의지적 행동으로 혈육에 참여하셨다. 즉, 우리와 이런 관계를 맺기고 자원하신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자녀들과 같은 본성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 주님께서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이 관계에 들어오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런 관계에 들어오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당해야 할 일을 당하기 위해서이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5).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교회와 관계를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다.
(2)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는 신비로운 관계가 존재한다
이 점은 사람들이나 다른 어떤 일들과의 관계 중에서 가장 엄격하고 사실적이며 도덕적인 연합이나 관계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몸의 머리와 지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나, 포도나무와 그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는 진정하고 도덕적이며 진실한 관계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존재함을 풍성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요 남편이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거룩함을 입고 구원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고난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일의 효력이 교회에 전가되는 것 역시 옳다.
(3)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한 새 언약의 보증자가 되신다
구별되는 두 인격들 사이에 연대적 연합이 있다 그 연합을 이루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목적에 따라 연대적인 연합 역시 다양해진다. 거기에 보증인이나 후원자가 되어 그 일에 책임지고 담당하게 된다면, 그 연대적인 연합은 매우 뛰어난 연합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교회를 위해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는니라”(히 7:22).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향하여 요구되는 것들을 그들을 위해 대신 당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하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죄인들의 죄책과 형벌이 그들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옮겨지는 신비에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그 교회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이는 모든 방면에서 무죄하고 순결하며 스스로 의로워야 한다. 그분은 성경의 모든 계시의 생명이요 혼이요 중심이시다. 이런 점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지극히 영광스럽고도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 어떤 마음도 이와 관련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상하거나 표현해 낼 수 없다.
2 그리스도의 직무의 열매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겸비함과 사랑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겸손과 사랑의 몇 가지 열매들 속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큰 영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높아진다는 면에서 그 영광이 빛난다.
통치와 다스림에서 드러난 공의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더 합당한 개념은 없다. 그 죄를 마땅하게 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 행위에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첫 번째 행동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영원히 심판하시는 데서 행사되었다. 또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하신 일 가운데도 드러났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의 한 표징이다
온 교회, 하나님의 선택받은 모든 백성들은 죄인이다. 그들은 아담 안에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아담 안에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가? 택하신 백성들을 모두 벌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죄지은 천사들이나 첫 사람 아담을 아끼지 않은 그 공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절차와 경우가 조화를 이루거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확립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일이 서로 모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영원토록 넘어지고 멸망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형벌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이 놀라운 일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사함이 복된 조화를 이룬다.
(롬 3:24-25, 개정)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양심은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걸려 넘어져 영원한 파멸로 자신을 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제거되고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율법의 공의가 행사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은혜와 긍휼이 그 영향력을 최고로 행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영혼들을 만족하게 하는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선언하고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긍휼을 행사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히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영혼이 주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로 하여금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 하시옵고, 그 영광의 아름다움과 충만한 속에서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지금 이 세상에 살 때에도 그 영광으로 감격하게 하옵소서.”
2)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고 성취하시는 그 순종 속에서 영광이 드러난다.
그런 순종은 순종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과 의의 차원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연합을 힘입어 그 율법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시고 그것의 영원한 상급을 덧붙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참으로 드러나게 된다.
(롬 8:3-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으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것이고 모든 반론에 대처해 나갈 것이며, 가난하고 시험받고 의심하는 영혼들의 모든 낙담을 극복하여 이기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들이 휘장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닻과 같다. 그것이 모든 시련과 폭풍과 삶과 죽음 가운데 있는 온갖 시험을 이겨 내고, 견고하도고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붙들어 줄 것이다.
이 장의 제목과 관련하여 직접 유추할 수 없는 세 가지 문제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이 다 우리의 것을 간주되고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의의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도 공평한 일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그 모든 고난의 열매와 유익에 우리가 참여하되, 마치 우리가 직접 그 일을 한 것같이 그 유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이 연합은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과 의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일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로 할 수 없이 영화로우시다.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라고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딘지 이치에 맞지 않게 보인다. 의인이 불의한 자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이 공정하고도 공평한 처사인가? 거기 어디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가?
1 교회의 구원을 위해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직무의 정당성
그러면 이 일의 공평성과 그 정당한 근거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모든 태한 백성들, 곧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아담 안에서 율법을 어긴 일로 인해 저주 아래 떨어졌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죽는 것과 영원히 죽는 것이 다 저주에 포함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죄가 심판받지 않은 채 그냥 간과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과 거룩과 진리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정하셨다면, 반드시 그들이 당할 그 형벌을 다른 데로 옮겨야만 했다. 그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 형벌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기에 그들의 죄가 형벌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그 형벌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에게로 옮겨져야만 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 형벌이 옮겨지는 식의 전제는 기독교의 근본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계시의 기초이다. 가장 처음에 주어진 약속 안에서 그 점이 먼저 시사되었고, 그 후에 구약의 모든 제도들을 통해서 그것이 설명되고 확증되었다. 율법의 제사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과 용도는 형벌 받을 자에게서 그 형벌을 벗겨 대신 희생될 이에게로 옮기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것이 왜 공평하고도 공정한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드러난 말로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본성의 빛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불의를 행하지도 않고 행하실 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엄명하셨다. 물론 그들도 죄인이기에 그들의 아버지의 죄를 대를 이어 짓는다. 그러나 가장 악한 죄인이라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그들이 자기의 아버지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면,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합법적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잡히게 하신 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으며, 특히 므낫세 때에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벌하신 것이다(왕하 23:26-27).
가나안은 그 아버지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5). 사울의 일곱 아들들은 피에 굶주린 그 아버지의 잔악성 때문에 죽음에 처해졌다. 또한 다윗의 죄 때문에 칠만 면의 백성이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그 일에 관하여,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하 24:17)라고 슬퍼했다. 노아의 홍수 때 죽임을 당한 모든 어린아이들이나 영아들의 경우가 그러했고, 소돔고 고모라 불탈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은 신적 공의의 성질에 위배되지 않고, 사람의 이성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2) 이런 공의가 문란하게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시행하려면 언제나 특별한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한다. 죄를 짓는 자와 그 죄 때문에 심판받는 자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먼저, 형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려면 특별한 관계가 요구된다.
앞에서 말한 경우가 그러듯이 부모와 자녀 관계이거나 다윗의 경우처럼 왕이나 신하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짓는 자나 고통을 당하는 자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한몸 안에서는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당연히 다른 지체들도 고통을 당할 수가 있다.
또는 서로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형벌을 받는 자들은 그들과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형벌을 받는 것이 죄지은 자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이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그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심판의 일부가 자녀들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들의 대한 징벌의 가시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그 어떤 경우보다 더욱 긴밀하고도 친근하여 훨씬 더 높은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당하고 공평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독특성과 고유성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와 세 가지 방면에서 관계를 맺고 계신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독특하고 고유한 방식을 채택한다.
(1)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첫 번째 관계는 육친적인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에서 낙 하셨다(행 17:26). 그러므로 모든 인류 사이에는 동족 관계, 또는 동맹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형제이며 이웃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워야 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개정).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
(히 2:14-15, 개정)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래서 성경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말한다.
우리와 육신적으로 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하시기 위하여 무한히 겸손하게 낮아지신 그분의 모습을 앞에서 이미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인성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고도 탁월하다.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의지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는 필연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나 선택의 행위로 그런 관계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다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의지적 행동으로 혈육에 참여하셨다. 즉, 우리와 이런 관계를 맺기고 자원하신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자녀들과 같은 본성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 주님께서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이 관계에 들어오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런 관계에 들어오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당해야 할 일을 당하기 위해서이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5).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교회와 관계를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다.
(2)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는 신비로운 관계가 존재한다
이 점은 사람들이나 다른 어떤 일들과의 관계 중에서 가장 엄격하고 사실적이며 도덕적인 연합이나 관계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몸의 머리와 지체 간에 존재하는 관계나, 포도나무와 그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는 진정하고 도덕적이며 진실한 관계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존재함을 풍성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요 남편이 되신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거룩함을 입고 구원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고난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당한 일의 효력이 교회에 전가되는 것 역시 옳다.
(3)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한 새 언약의 보증자가 되신다
구별되는 두 인격들 사이에 연대적 연합이 있다 그 연합을 이루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목적에 따라 연대적인 연합 역시 다양해진다. 거기에 보증인이나 후원자가 되어 그 일에 책임지고 담당하게 된다면, 그 연대적인 연합은 매우 뛰어난 연합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교회를 위해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는니라”(히 7:22).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에 입각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향하여 요구되는 것들을 그들을 위해 대신 당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하고 교회가 거룩해지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죄인들의 죄책과 형벌이 그들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옮겨지는 신비에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그 교회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이는 모든 방면에서 무죄하고 순결하며 스스로 의로워야 한다. 그분은 성경의 모든 계시의 생명이요 혼이요 중심이시다. 이런 점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지극히 영광스럽고도 보배로우신 분이다. 그 어떤 마음도 이와 관련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상하거나 표현해 낼 수 없다.
2 그리스도의 직무의 열매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겸비함과 사랑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겸손과 사랑의 몇 가지 열매들 속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큰 영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높아진다는 면에서 그 영광이 빛난다.
통치와 다스림에서 드러난 공의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더 합당한 개념은 없다. 그 죄를 마땅하게 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 행위에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첫 번째 행동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영원히 심판하시는 데서 행사되었다. 또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하신 일 가운데도 드러났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의 한 표징이다
온 교회, 하나님의 선택받은 모든 백성들은 죄인이다. 그들은 아담 안에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아담 안에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가? 택하신 백성들을 모두 벌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죄지은 천사들이나 첫 사람 아담을 아끼지 않은 그 공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절차와 경우가 조화를 이루거나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확립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일이 서로 모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영원토록 넘어지고 멸망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형벌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이 놀라운 일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사함이 복된 조화를 이룬다.
(롬 3:24-25, 개정)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양심은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걸려 넘어져 영원한 파멸로 자신을 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제거되고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율법의 공의가 행사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은혜와 긍휼이 그 영향력을 최고로 행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영혼들을 만족하게 하는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선언하고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긍휼을 행사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히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영혼의 안식과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영혼이 주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로 하여금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 하시옵고, 그 영광의 아름다움과 충만한 속에서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지금 이 세상에 살 때에도 그 영광으로 감격하게 하옵소서.”
2)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이루고 성취하시는 그 순종 속에서 영광이 드러난다.
그런 순종은 순종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과 의의 차원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연합을 힘입어 그 율법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시고 그것의 영원한 상급을 덧붙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참으로 드러나게 된다.
(롬 8:3-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으로 그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것이고 모든 반론에 대처해 나갈 것이며, 가난하고 시험받고 의심하는 영혼들의 모든 낙담을 극복하여 이기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들이 휘장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닻과 같다. 그것이 모든 시련과 폭풍과 삶과 죽음 가운데 있는 온갖 시험을 이겨 내고, 견고하도고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붙들어 줄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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