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청교도의 설교
1. 설교자의 태도
말씀의 설교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 사역에 속한 가장 중대하고 가장 뛰어난 과업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사역자가 부끄럽지 않고 또한 자신과 듣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자신의 모든 사역을 다음과 같이 행해야 한다.
1) 수고하여(즉 전력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태만하게 행하지 말라. 2) 명백하게 즉 가장 재능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 3) 신실하게 즉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과 덕성 함양과 구원을 바라보라. 4) 지혜롭게 즉 자신의 모든 교리, 권고, 특별히 견책을 가장 적절하게 설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하라. 5)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도록 하며 타락을 유발할 수 있는 몸짓과 음성과 표현을 피하라. 6) 사랑의 감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건한 열심과 그들이 선하게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7)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마음으로 설득하라.
박스터의 말이다.
강단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 자신의 심령을 각성시키어 여러분이 죄인들의 심령을 각성시키기에 적당하게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의 성도들에게 여기에서나 지옥에서나 잠이 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하십시오.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처럼 큰 일에 대해 냉담하거나 무관심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하나님과 많이 거하십시오. 목회자는 회중에게 나아가기 전에 심령으로 특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만일 심령이 차가우면 어떻게 그가 듣는 자들의 심령을 따뜻하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청교도는 성경을 개인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적용을 수반하여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설교했고 성경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의해 자신들의 내용을 믿을 수 있고 설득력있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시키는 것이 되도록 애쓰는 사람들로 설교했다. 청교도의 강단의 열정은 파악하고 파악되어야 하는 은혜와 경건,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의 회중을 위한 명확한 구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었다.
2. 청교도 설교자들
청교도 설교의 본래 탄생지는 캠브리지였다. 청교도의 설교 전통은 캠브리지 대학의 첫 번째 대복음 운동의 지도자들- 윌리암 퍼킨스, 폴 베인스, 리차드 십스, 존 코튼, 존 프레스턴, 토마스 구드윈-에 의해 16세기와 17세기의 전환점에 창조되었다. 청교도주의는 깊은 칼빈주의적 경건과 생명력있는 신앙에 대한 절박한 관심이었다. 이 전통은 스펄전, 존 라일, 알렉산더 화이트를 통해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고, 20세기에 와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가 거의 홀로 이 전통을 이어갔다.
3. 청교도의 설교 사상
설교에 대한 모든 청교도 사상은 네 가지 원리에 기초된다.
1) 지성의 탁월함에 대한 신념이다. “모든 은혜는 이해에 의해 돌아온다”.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육체적 폭력으로 인간들을 행동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에 말하시고 신중한 동의와 지적인 순종의 응답을 요구하신다. 설교자가 심령에 이르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유일한 길은 머리를 통해 가는 길이다.
2) 설교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신념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었다. 하나님의 진리의 신실한 선포와 순종의 들음보다 더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은 없다. 어떤 환경에서든 설교는 예배 행위이며 따라서 그렇게 수행되어야 한다. 더욱이 설교는 교회에 있어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목회자와 회중은 모두 주일 설교가 그 주간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임을 깨달아야 한다. 설교는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자들은 연구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설교를 지지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묵상하고 연구할 것을 명했다”고 구드윈은 말한다. 박스터는 이 원칙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령께 대한 복종 가운데 이성과 기억과 공부와 책과 방법과 형식 등에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한다면 그것들은 성령을 소멸하기는커녕 적절하게 필요한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수단이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설교를 죽는 날까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시므온은 한 번의 설교 원고를 삼십 번이나 고쳐 작성했다고 말했다. 훌륭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요한다. 설교 준비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설교할 자격이 없고 목회에 전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3) 성경의 생명을 주는 능력에 대한 신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창조주의 자신에 대한 기록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눈의 빛이며 영혼의 음식인 것이다. 설교자의 직무는 성경의 내용으로- 자신들의 공상한 마른 껍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회중을 먹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 설교ㅕ하거나 성경 메시지의 생기를 주고 영양을 주는 능력에 대한 절대적이며 확실한 신뢰없이 설교하는 것보다는 전혀 설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목자는 그의 주된 관심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을 주는 진리들을 설교하여 자기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람이다.
4) 성령의 주권에 대한 신념이다. 청교도들은 설교의 궁극적인 효과는 사람의 능력 밖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직무는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데 충성하는 것이다. 그 진리를 확신시키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청교도들은 ‘결단’을 감언 이설로 꾀는 현대의 복음 전도의 호소를 인간이 성령의 영역을 침범하는 잘못된 시도라고 비판할 것이다. 회심의 때를 정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효과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특권이다. 설교자의 강단에서의 행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함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제 이 확신들이 산출한 설교 형태를 묘사하고자 한다.
① 청교도의 설교는 방법에 있어서 해석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말씀의 종으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신탁’으로 말해야 했다. 시므온은 “본문을 금언으로가 아니라 저자의 의미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설교자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 담아놓으신 바를 자신의 본문에서 끌어내는 해석이었다. “나는 그 구절의 의미와 관련된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면 절대로 설교하지 않는다”. “내가 해설하고 있는 구절에 성령님의 생각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것 이상이나 이하를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구절의 완전하고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 때 그 구절을 건드리지 말라”. 청교도들은 연속적인 주석의 열성가들로 하나의 본문들만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장들과 책들에 대한 주석 설교들을 엄청나게 남겼다. 매튜 헨리의 놀라운 주석의 대부분은 먼저 체스터의 자신의 양떼들에게 설교되었던 것이다.
② 청교도의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 교리적이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이 완전하게 담겨져 있고 스스로 해석하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이 ‘신성의 본체’인 계시는 이 ‘가장 휼륭한 책’의 모든 부분이 독특한 기여를 하는 하나의 통일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따라서 단일 본문들의 의미는 ‘전체’의 나머지 부분과 관계하여 보지 않으면 바르게 식별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뒤집어 말해서 전체를 더 잘 파악하면 할수록 각 부분의 더 많은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 사람은 먼저 훌륭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은 교리를 설교했다. 교리 설교는 분명히 위선자들을 지루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양들을 구원하는 설교는 오직 교리 설교 뿐이다. 설교자의 일은 불신자들에게 여흥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설교하는 것이다. 염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먹이는 것이다.
③ 청교도 설교는 그 배열에 있어서 규칙적이었다. 설교자들은 명확한 제목들의 가치를 알고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설교의 개략이 드러나도록 했다.
④ 청교도의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심오했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대중적이었다. ‘재치있는 설교’를 ‘경박한 냄새를 풍기고 무거운 진리들을 증발시키는 경향이 있는 오만한 바보짓’이라고 비난하고 이들은 ‘강단에서 설교자가 아니라 연극 배우들같이 행동한다’고 했다. 설교자를 높이는 설교는 덕을 세우지 못하는 죄악된 설교라고 했다. 라일의 표현을 빌리면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형식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었다. 기품있는 단순성- 연구된 명확성-은 그들의 이상이었다.
⑤ 청교도의 설교는 그 방향에 있어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청교도의 설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주위를 맴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여행자는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을 시야에서 놓치자마자 바로 길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므온의 설교들은 세 가지의 명백한 목표를 갖고 있었으니 곧 죄인을 낮추고 구주를 높이고 거룩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⑥ 청교도의 설교는 그 관심에 있어 경험적이었다. 설교자의 최고 관심은 하나님을 알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명백히 ‘실천적’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죄, 십자가,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성령, 믿음과 위선, 확신과 확신의 결여, 기도, 묵상, 유혹, 절제, 은혜 안에서의 성장, 죽음, 천국은 그들의 부단한 주제들이었다. 성경과 자신의 심령이라는 두 개의 책을 함께 공부하라고 했다. 오웬, “자신의 영혼에 설교한 설교자라야 다른 사람에게 훌륭하게 설교된다. 만일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청교도들의 묵상과 기도의 열심을 다한 실천, 그들의 죄에 대한 예민성, 거룩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헌신은 그들을 영혼의 숙련된 의원이 되게 무장시켰다.
⑦ 청교도의 설교는 그 적용에 있어 날카로왔다. 모든 다양한 집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어야 했다.
⑧ 청교도의 설교는 그 태도에 있어 능력적이었다. 청교도는 강단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간절히 바랐다. 청교도는 박스터가 ‘생명과 빛과 무게를 가지고 정말 진지하게 완전히 가슴으로부터 말하는 명확하고 끈질기고 솔직한 설교자’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절대로 다시 설교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그리고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청교도는 전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교는 자기 회중을 어깨에 매고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울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심령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브라운). “우리의 신령한 진리에 대한 증거와 예증들은 성경에서 이끌어 낸 신령한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뛰어난 풍미를 잃은 설교는 병든 심령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심령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중생시킨 씨앗이다. 말씀은 참된 신자들의 심령에 존재하는 모든 거룩한 생각들을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찍은 인이다. 우리의 모든 일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의존에 대한 깊은 의식하에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이 일로 보내신 분께 빛과 생명과 힘을 얻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설교 뿐만 아니라 기도도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설교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시도록 하나님을 설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믿고 회개하라고 설복하지 못할 것이다.”(박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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