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 강해` 9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김영희)

강대식 2018. 7. 13. 16:41

9 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 8절을 계속 연구하는 것은 이 구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평생 축복을 구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보를 이루고자 애쓰지만, 사실은 출발도 하지 못한 탓에 항상 혼란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주님은 8절에서 이 점을 아주 완벽하게 요약해 주신다. 거듭남은 신비이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가 새 생명을 받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데 있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가장 큰 원수가 되어 왔다. 기독교회도 단순한 종교의 한 형태로 전락할 수 있으며, 오로지 종교의 영역만 취급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바울은 한 때 교회를 박해한 것은 독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확신하여 양심을 따라”(23:1) 행동했다고 말한다. 종교와 종교를 의지하는 태도보다 더 참된 신앙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해로운 것은 없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까지 다양한 시금석들을 살펴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점은 종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지 즉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신령한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싶은 열망이 점점 커짐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형제를 향한 사랑보다 앞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시금석을 제시하는 순서에 의문을 품을 지도 모른다.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형제를 사랑하느냐가 먼저이다.

우리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이며 객관적인 시금석에서 출발하여 좀 더 내적이고 민감한 시금석으로 접근하고 있다. 지금 시금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는 것이며 그 열망이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알고 싶은 열망과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은 열망을 구분하고 싶다. 종교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큰 원수 이다 그 다음 원수로 확실히 지목할 것은 철학이다. 철학의 문제점은 지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만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절대자’, ‘원인 없는 원인’, ‘궁극적 실재’, ‘존재의 기반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처럼 늘 비인격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기독교적 입장의 본질적 핵심은 인격적인 데 있다. 우리는 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데, 철학자들도 종종 그렇게 치우치는 것을 보게 된다. 수년간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면, 갑자기 전부를 내려놓고 이른바 신비주의로 돌아선다. 지성을 팽개치고 내적체험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다. 전에는 자기 밖에서 신을 찾으려 했다면 이제는 안에서 찾으려 한다. 예를 들면, 1920년대의 지식인을 대변하는 올더스 헉슬리는 인생 후반기에 신비주의에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불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런 위험을 피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적인 것을 강조하는 태도는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거듭나면 내적으로, 인격적으로, 직접 하나님을 알고 싶은 열망이 생길 뿐 아니라 그 열망이 주된 목표가 된다. 거듭난 자는 종교적 관심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깨닫는다. 종교적 활동과 의무에 의존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니고데모에게서 그것을 보게 되며, 회심 전의 바울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교회는 항상 조직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 기관으로 변질하기 쉽다. 교인들이 할 일을 정확히 알려주고 거대한 체계의 일원으로 참여시킨다. 하루 전체, 어떤 의미에서 인생 전체의 계획을 세워 준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여러 절기에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지 다 알려 준다. 그런데 그것은 다 외적인 일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데, 그것은 행위를 의지하는 태도이다. 종교적 관심과 활동과 의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 위대한 종교개혁과 부흥 운동은 언제나 단순하게 일어나 신자들을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고도 신학과 교리에 관심을 쏟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취미 삼아 신학 서적을 읽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신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모여 결정적이고 미묘한 논점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할 수 있다. 저도 그 단계를 거쳤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신학 지식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안다. 지식은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안다. 모든 지식과 이해의 목적과 역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끄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축복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체험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을 더 간절히 열망한다. 생명은 표출되기 마련이다. 항상 표출되고 계속 표출됨으로 생명이 아닌 것들을 폭로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미묘한 시금석이다.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질 위험이 있다. 마귀는 우리를 그 수준에 붙잡아 두려한다.

 

이 구분의 중요성을 알겠는가? 축복과 체험 없이는 사교가 번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마귀는 이 무기를 손에 쥐고 기독교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한다. 기독교 용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온갖 수단을 활용해서 축복과 은사의 차원에만 관심을 붙들어 매며 평생 그것만 추구하게 한다.

이 문제를 올바로 바라보는 방법은 생명을 받은 자는 축복과 체험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순서를 뒤집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축복과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아이 때는 상대방보다 그가 주는 물건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장성한 사람이 되면 그 판단은 완전히 뒤바뀐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인격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성숙의 표지이다.

 

여러분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아이는 훈련과 질서와 단호한 것과 이해가 필요한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선물이 수반되는 재미있고 즐거운 차원에 머물고 싶어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훈련에 도움이 되는 이들을 귀히 여기게 된다.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이들이 그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내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로 인해 감사하며 후회하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보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표지요 성장의 표지이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13:15)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17:3) 영생은 단순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의 의미는 즉각적이고 인격적이며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그 생명을 주어 구원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시려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이 일이 가능함을 안다. 이 또한 종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점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지 밀러는 기도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간구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애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5:24),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23) 그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체험을 했다는 것, 하나님의 벗에게 말하듯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야곱이 돌배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7)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교통했음을 알았고 그 체험을 잊지 못했으며, 그 후에도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항상 첫 경험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인 전기요, 중심 사건이었다. 우리도 이 체험을 해야 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

모세는 하나님이 백성을 벌하시고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겠다고 하셨을 때,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33:15)라고 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체험하기를 고집했다. 열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반란으로 피해 광야로 갈 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라고 신음했다. 다윗은 건물도 없고 예배 의식도 없는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듯 광야에도 실제로 계심을 알았다. 그는 압살롬을 무찌를 힘을 주신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싶어 했다.

 

- 이 갈망이야말로 우리 영혼 안에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 증거라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알고자하여”(3:10)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방인의 사도이다. 그가 알고자 했던 지식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 마음의 지식, 내적인 지식이었다. 생명은 생명을 찾게 되어 있다. 이 열망이 새 생명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는 책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허기와 갈증을 느낀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그를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선물과 은사와 재미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마귀는 체험과 은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것을 위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이 열망만큼은 위조할 수 없다. 마귀는 이 열망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위조할 수 없다. 이 열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의 씨를 우리 안에 심으시는 하나님뿐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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